원양 실습선 승선기Ⅱ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포항까지



2008년5월3일. 블라디보스토크, 자기가 사는 곳과 우리를 이어주려고 지성으로 애를 쓰던 안내인 갈리나, 블라디보스토크 속에 들어와 있는 대한민국, 민들레처럼 끈끈한 생명력으로 살아온 동포들, 그리고 남성을 누르는 활기로 살고 있는 여성들을 만난 블라디보스토크를 이제 떠난다.

떠날 시간이 다가온다. 오후 2시 반으로 출발이 결정되었다. 포항에는 5월5일 낮에 도착할 것이라 한다. 아이들과 함께 5월6일 울릉도로 돌아가기로 했다. 통신실에서 위성 전화를 빌어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6일 아침에 포항으로 와서 울릉도로 함께 가자고 했다. 아이들과 함께 뱃머리에 플래카드를 펼쳐 놓고 항구를 배경으로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는 기념 촬영을 하였다.

부두를 이어주던 다리를 걷고, 쇠말뚝에 메어져 있던 계류선을 끌어 올렸다. 배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2시50분. 부두에 나와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부두의 사람들은 배를 향하여 손을 흔들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사람들과의 작별 인사다.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다.

항구가 멀어져 갔다. 해안 산기슭에 깃든 동네 블라디보스토크, 산 위엔 높고 낮은 빌딩이 즐비하고, 부두엔 크고 작은 크레인이 항구를 장식하고 있었다. 옛날에는 군사 항구였지만, 지금은 화물의 항구요 물류항인 블라디보스토크,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를 블라디보스토크가 점점 멀어져 간다.

3시20분, 파일럿선이 다가와 우리가 탄 배에 닿았다. 출발하면서 타고 있던 파일럿이 도선의 임무를 마치고 그 배로 건너갔다. 모든 출항 수속이 다 끝난 것이다. 조타실에 올라가니 배는 10.3노트로 달리고 있다. 항구는 점점 지워져 간다. 조타실의 시계를 1시25분으로 고쳤다. 다시 대한민국의 시간으로 돌아온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시간과도 작별이다.

우리 시간 2시가 넘으면서 항구는 바다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바람이 불고 배가 앞뒤로 요동을 했다. 바다를 보니 너울이 치고 있다. 2시20분 배는 시속 11.5노트, 238° 방향으로 가고 있다. 선창 밖에는 물결이 하얗게 부서진다. 무사히 갈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망망한 바다의 연속이다. 이 광막한 바다에 떠 있는 배의 모습이란 바람에 불리는 한낱 가랑잎 같고, 그 속의 내 모습이란 참으로 왜소하다. 문득 모든 것에 겸허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너울성 파도는 계속 조금씩 일고 있었지만 배의 요동은 조금씩 진정되어 가는 것 같다. 일행들은 망망한 바다만 보고 가야하는 지루함을 이기기 위해 카드놀이를 하거나 잠에 빠졌다. 나는 컴퓨터에 앉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다시 생각한다.

5시. 블라디보스토크를 벗어난 지 3시간이 넘었다. 문득 섬이 보인다. 조타실로 가서 선장에게 어느 나라 섬이냐 물으니 아직 러시아라 한다. 러시아 영해를 벗어나자면 2시간은 더 가야 한단다. 항속도 느리지만 러시아의 광대함을 짐작할 만하다. 항로는 178°로 변침되었다. 변침점을 지난 모양이다. 바다가 조용해 졌다. 김 부장은 호수에 기름 발라 놓은 것 같다는 기막힌 표현을 했다. 김 부장이 갑자기 시인이 된 것 같다.

5시 반에 오이냉채, 꽁치구이로 저녁을 먹었다. 저녁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지만 러시아 시간으로는 7시 반이니 이른 시간도 아니다. 글을 하나 썼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난 한국’-. 블라디보스토크를 여행하며 만난 우리나라를 생각해 본 것이다. 어느 슈퍼마켓에서 만난 두 사람의 블라디보스토크 아가씨. 우리나라 충청북도 진천에서 온 장미 판촉단의 도우미들었다. 한복을 입는데 옷고름을 맬 줄 몰랐다. 내가 도와준다는 것이, 아차! 실수를 하고 말았다. 마주보고 매어주다가 보니 방향을 거꾸로 잡아준 것이다. 내가 매어주는 순간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고름을 잘못 매어준 것을 깨달았을 때는 카메라 플래시들이 터진 뒤였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망망한 대해를 보면서 다시 한 번 겸허를 생각한다.

지금 시간 7시34분. 시간도 방향도, 바다 길도 조국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딴 방으로 놀러간 사이에 나 혼자만 있는 선실에서 모든 생각들을 비우고 모처럼 108배를 했다. 온몸에 땀이 솟았다. 목욕탕에 가니 물을 아껴 쓰자는 표어가 붙어 있었다. 미안하게 생각하며 대여섯 바가지로 샤워를 했다. 어디서나 물은 소중한 것이지만, 배 안에서는 물이 곧 생명이다.

베는 출렁이면서 달리고 있다. 이렇게 출렁이는 것은 배가 달리고 있다는 증거다, 삶도 이렇게 출렁일 때 살아 있는 것이 아닐까. 배는 지금까지 열 시간 넘게 출렁이고 있다. 영원히 출렁이어야 할 삶의 길, 그 한 길을 이 배가 달리고 있다.


2008년 5월 4일. 회색의 하늘에 해가 떠 있다. 쾌청은 아니지만 맑은 하늘이다. 바다는 잔잔, 간혹 배가 일렁이긴 하지만 파도는 없다. 새로운 해를 반기기 위한 배의 몸짓인지도 모르겠다.

5시10분경 눈을 떴다. 배가 달리고 있으니 화장실에 물이 잘 돌아 좋다. 변기 안에는 계속 물이 돌아가고 있다. 바닷물을 끌어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배가 정박하고 있을 때는 바닷물을 끌어 쓸 수도 없고 배 안의 물로써만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니 여간 불편하지 않았었다. 6시경 갑판에 나가니 수평선은 맑지 못해 해는 볼 수 없었지만. 수면이 빛나고 있다. 해가 떠서 구름 속에 들어 있는 모양이다. 운동 삼아 갑판 위를 몇 바퀴 돌았다.

7시10분 나물국으로 아침을 먹었다. 19시간 정도를 달려왔다. 어디쯤 왔을까. 조타실에 올라가니 자일로컴퍼스는 시속 11.7노트, 189.3° 방향, 흥남 앞 바다와 위도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210마일쯤 왔다고 한다. 이제 230마일쯤 남았는데 내일 이맘때면 포항항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섬 한 조각 보이지 않는 망망한 바다의 연속이다. 내 아득한 삶의 길 같다. 오늘도 건너고만 있는 내 삶의 아득한 바다-.

10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민들레’, 민들레 홀씨처럼 살아온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들을 생각해 본다. 숱한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온 신한촌 동포들, 조국의 아픈 역사를 운명인 양 안고 산 사람들이었다. 하늘이 흐리고 너울이 일고 있다. 배가 흔들린다. 그동안 너무나 잘 왔다. 이제는 조금 흔들려서 고난을 체험해 보는 것도 괜찮으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11시50분. 23시간을 달렸다. 조타실에 올라가니 245마일을 왔다고 한다. 어로한계선에 닿고 있다. 위도상 원산 앞 바다 쯤이라고 한다. 밤 8시 경이면 울릉도 30마일 해상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 한다. 하늘이 맑으면 멀리서나마 울릉도를 보면서 지나갈 수 있을 것이라 한다. 12시 카레라이스로 점심을 먹었다. 선장이 내일 아침 5시 반 경, 포항에 도착하여 앵커를 내리고 대기했다가 9시경 입항할 것이라 예고한다. 생각보다는 일찍 도착할 것 같다. 너울이 계속되고 있다.

위성 텔레비전에서는 전국노래자랑이 벌어지고 있다. 노래자랑은 어디서 봐도 흥겹다. 배도 노래자랑 가락에 맞추어 흔들리는 것 같다. 그 흥겨움 속에 살기 때문일까. 사회자 송해 씨는 늙을 줄도 모른다. 노래자랑이 끝나고 조타실에 올라가 보니. 배는 속초 근해를 지나고 있었다. 이제 우리의 영해를 달리고 있다. 25시간 넘게 항해하고 있는 중이다. 조타실은 모두 6명이서 두 사람씩 4시간을 2회 근무한다고 한다. 노동법의 근로 기준 시간에 맞추어 하루 8시간씩 근무한다는 것이다.

배 한 척, 갈매기 하나 날지 않는 바다, 바다, 바다. 고깃배가 다니기에는, 갈매기가 날기에는 너무 먼 바닷길인 모양이다. 우리의 영해를 달리고 있지만 아직도 핸드폰이 터지지 않는 것을 보니 육지는 아직도 아득한 모양이다. 집을 떠난 지 일주일이 넘었다. 아이들은 엄마가 보고 싶고, 엄마가 끓여주는 된장이 먹고 싶다고 했다.

5시, 김 부장의 전화기에 마침내 신호가 왔다. 부인이 보낸 것이다. 터질 때까지 연거푸 신호를 보냈을 그 사랑의 얼굴을 상상해 본다. 내 전화기도 통화가 될까 하여 전원을 넣었으나 신호가 뜨지 않는다. 아내도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는 중일까. 하늘은 흐리고 바다엔 너울이 일고 배가 흔들리고 있다. 김 부장의 전화기로 아내와 통화를 했다. 아픈 다리가 어떠냐고 물었다. 대퇴부의 통증을 안고 오른 뱃길이었다. 견딜만 하다며 아내를 위로했다. 내일 포항에 도착하면 모레 함께 울릉도로 가자고 했다. 갑판 위를 걸어서 열 바퀴를 돌았다. 좁은 배 안에서만 지내다 보니 운동량이 많이 부족하다. 너울성 파도가 계속 일고 있다.

6시 돼지고기 찌개와 동태국으로 저녁을 먹었다. 바다에 어둠이 내렸다. 뱃길을 따라 하얗게 부서지는 물보라만 보일 뿐이다. 이제 울릉도 근해를 지나가고 있겠다. 하늘이 흐려 시계가 불투명하다. 배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지만 호사로 삼을 만하다. 나 혼자 있는 방에서 108배를 하려다 70배만 했다. 물을 아껴야 하기로 샤워를 할 수 없어 땀을 너무 내지 않기로 했다. 오른쪽 대퇴부가 계속 결리고 아프다. 돌아가면 병원부터 가보아야겠다.

9시 김 부장이 나를 위해 술판을 차려 왔다. 말린 동태 한 마리 얻어 선원 이재호 씨와 함께 왔다. 그는 이리 흔들리는 배 안에서도 계속 공부를 하여, 곧 석사 학위를 받을 것이라 한다. 항해 일정이 끝나면 대학원에 가서 논문을 발표해야 한다고 했다. 선실을 공부방으로 삼은 그 정성과 끈기가 놀랍다. 김 부장의 성의를 생각해 물로 희석한 소주 몇 잔을 마셨다. 위성 텔레비전에서는 포항 뉴스가 나오고 있다. 육지가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다. 배가 많이 흔들리고 있다. 여정을 다해 가면서 인상 깊은 기억으로 마무리지어 주기 위해 바다가 요동하는 모양이다.

그 요동 속에서 잠이 들어야겠다.


2008년 5월 5일. 눈을 뜨니 5시35분. 배의 엔진 소리가 조용하다. 갑판에 나가보니 배는 포항 앞바다에 앵커를 내려놓고 있었다. 배는 5시20분에 도착했다고 한다. 잠결에도 배의 심한 요동이 느껴지긴 했지만, 포항에 닿아 있을 줄은 몰랐다. 지난밤에 비가 뿌린 듯 갑판이 젖어 있었다. 배가 많이 흔들렸었다. 포스코의 불빛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 6시. 하늘이 흐리고 높은 구름과 낮은 구름이 방향을 엇바꾸어 흐리고 있었다. 뉴스를 들으니 동해에 강풍주의보가 내려지고 파고가 4m로 일 것이라 한다. 울릉도로 가는 배는 뜰 수가 없을 것 같다.

7시 콩나물국으로 배 안의 마지막 식사를 했다. 전화기를 이제야 살렸다. 울릉도 선착장으로 전화를 해 보니 썬플라워호는 예정대로 뜬다고 했다. 그러나 8시20분경의 문의에서는 1시쯤 출항 예정인데, 확실한 것은 11시쯤 되어야 알 수 있다고 했다. 8시50분경 앞 바다에 정박하고 있던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항구로 들어와 9시20분에 부두에 선체를 붙였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일정이 끝났다.


아이들과 함께 했던 원양 승선 실습의 머나먼 뱃길.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무사하기만을 바랐다. 아무 탈 없이 잘 다녀오기만을 바랐다. 내 바람대로 병 하나 난 사람 없이, 멀미도 한 사람 없이 무사히, 아무 탈 없이 잘 다녀왔다. 참으로 순항했던 항로였다. 그러나 이 아이들의 앞으로의 항로에, 그 삶의 길에 어찌 순항만 할 수 있을까. 배가 조금 높은 파도에 무섭게 흔들리기도 하고, 멀미도 좀 하면서 강인한 정신력과 인내력도 기르게 할 필요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무사히 실습을 마치고 난 뒤의 사치스런 일까.

기항지 블라디보스토크의 풍물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던 것은 실습의 덤이긴 하지만, 우리를, 나를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은 무사한 항로에 이어 또 하나의 다행스런 일이라 하겠다. ‘다행’으로 끝을 맺는 원양 항해 실습처럼 아이들에게도, 모든 선생님들에게도 다행스런 일들이 많기를 빌 뿐이다. 아이들의 푸른 미래가 많고 큰 행운으로 빛나기를 빌 뿐이다.♣(2008.5.8)

 

※ 이어지는 글 보기

원양 실습선 승선기

블라디보스토크의 민들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난 한국

블라디보스토크 사람 갈리나

블라디보스토크의 밤 그리고 여성

원양실습선 승선기Ⅱ

 

      게시판 편지쓰기 방명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