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난 한국

-2008 원양 승선 실습 길에서·2



러시아어로 ‘동방을 점령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하는 블라디보스토크는 1860년에 건설되었다. 활짝 트인 대양에 닿으려고 하는 욕망을 따라 동쪽의 마지막 지점까지 내려온 러시아인들이 세운 도시다. 넓디넓은 바다에 접하면서 중국, 일본과도 가깝지만, 연해주와 국경을 인접하고 있는 우리나라와도 지리적으로 가깝다 보니 많은 우리 동포들도 블라디보스토크에 이주해 와서 살았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이주 동포가 획기적으로 증가하여 1920년대에는 12만 명에 이르다가 스탈린에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할 때인 1937년에는 20만 명에 이르기도 했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이 무참히 죽어가야 했고, 우리 동포의 본거지였던 신한촌은 폐허가 되어 버렸지만, 그로부터 70여 년이 흐른 지금 블라디보스토크에는 3,4천 명 가량의 동포가 살고 있다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사흘 동안 제일 먼저 만난 한국은 우리 배가 부두에 닿자마자였다. 우리나라의 두산중공업에서 수출한 굴삭기들이 가지런히 서서 반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굴삭기들은 우리가 부두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도 우리나라의 배가 들어와 계속 하역하고 있었다. 부두에 보이는 자동차는 거의가 일본제이고, 중장비는 대부분이 한국제였다. 이국에서 만난 우리나라 제품은 타향에서 만난 고향 사람 같은 반가움을 느껴지게 했다.

블라디보스톡 방문 첫 일정으로 찾아간 곳이 네벨스코이 국립해양대학교였다. 이 대학의 해양박물관에는 해양 개척의 역사와 각종 해양 자료를 전시해 놓고 있는데, 우리의 눈길을 모은 것은 우리나라 거북선과 이순신 장군이 쓴 투구 모형이었다. 세계 해전 사상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의 중요성을 이 대학에서도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대학 동양학부에 한국어과과 설치되어 있고 김남수 교수가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한국교육문화센터’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원래 발레를 전공했지만, 2년 전부터 이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지금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중학교에서도 한국어를 가르칠 만큼 한국어 붐이 일고 있는 중이인데, 이 대학에 한국어과가 설치된 것은 5년 전으로. 50여 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으며 5년제인 이 대학 학제에 따라 오는 6월이면 첫 졸업생이 배출될 것이라며 큰 기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 배우고 있는 러시아 학생들로 하여금 우리말 콩트를 시연하게 하였다. 센터 안에는 우리말 초․중․고 교과서들이 책꽂이에 꽂혀 있었다.

다음날, 버스를 타고 시내 관광을 하게 되었는데, 차를 타려다 보니 ‘○○관광’이라는 우리 글 회사명이 붙어 있는 중고 버스였다. 차에 오르니 ‘차내에서는 음주 가무를 금한다’는 우리말 안내서가 그대로 부착되어 있고, 출입문에 교통안전우수업체로 지정된 표지도 그대로 붙어 있어 우리를 미소짓게 했다. 우리나라에서 수입한 중고 차였다. 이 차만이 아니었다. ‘‘○○여객’이라는 표지를 단 차며, 노선 안내판과 노선번호를 그대로 단 우리나라 시내버스가 자주 눈에 띄었다. 이곳 사람들도 차는 많이 운행하고 있는데, 거의가 중고차로 승용차는 일본 것을, 버스와 같은 대형차는 우리나라 것을 선호한다고 했다. 우리나라 글이 새겨진 차를 그대로 운행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다기도 했다. 우리나라 제품에 대한 신뢰도를 보여 주는 것 같아 앉기도 불편한 고물 차를 타면서도 마음은 아주 편한 느낌이 들었다. 거리를 달리다 보니 빌딩 외벽에는 우리나라 회사의 에어컨 실외기가 즐비하게 보이기도 했고, 히딩크가 모델로 등장하는 우리나라 업체의 대형 텔레비전 광고판이 곳곳에 보이는가 하면 우리나라 휴대폰 판매 업소도 보였다.

우리를 더욱 감동하게 한 것은 러시아의 유명한 탐험가 아르세니예프를 기념하여 1945년에 개관했다는 그의 박물관에서였다.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의 역사와 자연, 민속 들에 관련된 자료와 세계대전 때의 무기 등 많은 수집품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발해의 유물들을 만난 것이었다. 화살촉, 도검류, 마구 등 몇 점의 유물이 러시아어 설명문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유물의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잃어버린 핏줄을 만나 것 같아 여간 반갑지 않았다. 8세기 초 신라와 함께 남북국시대를 형성했던 엄연한 우리의 역사, 대부분의 만주지역과 연해주, 북한의 영토를 차지하고 대륙을 호령했던 우리나라의 모습을 비로소 만난 감격이 전율이 되어 온몸을 타고 솟아올랐다.

발해의 유물이 역사 속의 우리나라라면, 현실 속에 살아있는 우리나라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나기도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대형 상가라고 하는 ‘벨라제프(В․ПАзЕР)수퍼마켓’에 갔을 때,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경제특별도 충북’이라는 커다란 글자와 함께 ‘JINCHEON ROSE FESTIVAL FROM KOREA’라 적힌 플래카드였다. 다시 보아도 분명 우리나라 충청북도 진천의 장미꽃 페스티벌 안내 현수막이었다. 충북 원예유통팀 류기창 사무관 일행이 많은 장미를 옆에 두고 홍보활동을 벌리고 있는 중이었다. 현재 진천의 장미를 블라디보스토크에 수출하고 있는 중인데, 더욱 활발한 수출을 위해 판촉 행사를 벌리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예쁜 러시아 아가씨 두 사람이 한복을 입고 고객들에게 장미 한 송이씩을 나누어주며 우리나라의 장미를 홍보하고 있었다. 류 사무관과  반가운 마음으로 손을 잡고 인사를 나누었다. 마치 고향의 오랜 지기(知己)를 만난 마음이었다. 아가씨가 건네주는 장미꽃 한 송이가 그리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었다.

아,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던 또 하나의 내 조국. 점심을 먹은 식당을 나와 길을 건너려는데 횡단보도 입구에서 한 여인이 상자 위에 채소 한 가지 달랑 얹어 놓고 길손을 부르고 있었는데, 얼른 보아도 그것은 분명 울릉도 ‘명이’였다. 울릉도 개척기에 굶주림에 떨던 사람들의 명을 이어준 나물이라 해서 ‘명이’라 불렀다는 그 명이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나다니! 그러고 보니 길거리 곳곳에 소리쟁이며 섬바디(돼지풀)을 닮은 식물들이 곳곳에 보였다. 이곳도 바다를 안고 있는 항구도시라 식생도 울릉도와 비슷한 것인가. 멀고먼 이국땅에서 울릉도를 만난 기분이 들어 심장의 박동마저 빨라지는 듯했다. 여기서는 무어라 부르는지 이름을 물어보지 못한 안타까움을 떨칠 수 없다가 나중에 만난 에이전트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이름을 물으니 이곳에서는 ‘체렘샤(cheremsha)’라 부르며 샐러드용으로 즐겨 먹는다고 했다. 우리 울릉도 사람들이 즐겨 먹듯이.

발해의 유물, 진천의 장미, 러시아의 명이가 우리의 역사와 조국 그리고 울릉도를 생각나게 했던 블라디보스토크 여행-. 내 발을 딛고 있는 곳, 내 삶의 터를 더욱 사랑해야 할 것이라는 새삼스러운 생각을 해본다. 그것이 곧 나를 사랑하는 일임에야 더욱 뜨겁게 사랑할 수 있기를 애쓸 일이라 생각해 본다. 짝사랑이 될지라도 사랑이 지닌 숭고미의 속성에 이를 때까지 내 삶의 터를, 나를 사랑해 볼 일이라 생각해 본다. ♣(2008.5.3 조국으로 돌아가는 배 안에서)

 

※ 이어지는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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