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보스토크의 민들레

-2008 원양 승선 실습 길에서·1



어디에서 홀씨가 날아왔을까. 블라디보스토크에도 민들레가 곱게 피었다. 톱니 모양의 빽빽한 잎들 가운데 솟은 꽃대 끝에 맑고 밝은 빛깔의 노란 꽃이 함초롬히 피어 있다. 우리나라 봄철 어디서라도 볼 수 있는 그 민들레 옆에는 역시 우리의 산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잎이 길쭉한 소리쟁이가 돋아 있다. 이곳 블라디보스토크의 식생도 우리나라와 비슷한 모양이다.

블라디보스토크 여정 이틀째, 우리는 '신한촌 기념탑'을 찾았다. 아르세니예프 박물관을 나와 버스를 타고 잠시 달려 기념탑 앞에 내렸다. 경사지게 다듬은 사각형 작은 화강암들이 주위를 두르고 있는 기단 위에 세 개의 높다란 사각 돌기둥이 우뚝 솟아 있다. 가운데 큰 것을 조국으로 하여 중앙아시아의 한인, 러시아의 한인을 상징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탑역 주위에는 철책을 둘러치고 출입문은 자물쇠로 잠글 수 있게 해놓았다. 관리인인 듯한 사람이 문을 열어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웨체스라브'라는 사람으로, 자기가 블라디보스토크 한인회 회장으로 있을 때 이 탑을 세웠다고 한다. 그는 한국어는 잘 모르지만 이주 한인 4세로서 조국 대한민국과 신한촌을 매우 사랑한다고 했다.

비문에는 우리나라 일제 강점기에 조국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던 신한촌의 아픈 역사를 비장한 필치로 기록해 놓고 있다. 한일합방으로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국권 회복을 위한 필사의 결의를 다지면서 성명회와 권업회 등의 애국 단체 결성, 한인학교의 설립, 신문 발간, 13도 의군 창설 등으로 민족적 역량을 배양하고, 1919년에는 망명정부(대한국민의회)를 세워 대일 항전 의지를 불태웠다고 한다. 1937년 한민족이 소련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함으로써 폐허로 변해야 했던 신한촌의 안타까운 역사에 대한 증언과 함께, 선열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 재러·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이 받은 마음의 상처를 위로하면서 후손들에게 역사 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이 탑을 세운다고 했다.

참으로 아픈 역사였다. 대양을 찾아 동쪽으로 내려온 러시아인들이 1860년에 세운 블라디보스토크는 연해주가 베이징 조약에 의해 러시아로 병합되면서 조선과 국경을 접하게 된다. 구한말 불안한 정치 상황으로 인해 살길을 찾는 한인들의 이주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어지면서 18701920년대의 신한촌 전경년대에 이미 8,400여 명에 이르렀고 1920년대에는 12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1870년대 말 이주 한인들이 블라디보스토크 라게르 산비탈 서쪽에 택지를 개발하자 신한촌 또는 한인촌이라 불리면서 이 도시의 모든 한인들이 이곳으로 옮겨오게 된다. 1893년부터는 일자리를 찾으러 러시아에 오는 모든 한인들이 이 곳에 정착하게 되어 점차 번성해면서 1920년대부터는 자치 기관을 설치하고, 1930년대에는 신문 잡지 발행, 각종 학교 건립, 도서관이며 방송국 운영에까지 이르게 된다.

1910년 일제에 의해 조국의 국권이 침탈되자 신한촌은 자연스레 독립 운동의 본거지가 되면서 일본군들과 잦은 충돌을 빚게 된다. 일본군이 살해당하는가 하면, 일본군은 한인들을 총살시키는 일들이 벌어진다. 1936년에는 소련과 일본간에 무력 충돌이 벌어지는데, 이런 일들이 모두 한인들 탓으로 돌려지게 된다. 마침내 1937년 8월 21일 스탈린의 명령에 의한 소련 인민위원회와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으로 한인들에게 중앙아시아로의 강제 이주 명령이 내린다. 강제이주 결정사항 문서에 기록된 공식적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조선 사람들의 첩자 행위 방지, 둘째 중앙아시와와 카자흐스탄의 농업인력 공급이었다. 한인들에게는 풍전등화의 위기로 내몰려야 하는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강제 이주 당시의 슬픈 이야기들은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에 잘 그려져 있기도 하다.

그 해 9월 두 차례에 걸쳐 연해주 국경지역에 사는 한인들부터 시작하여 내륙 지역과 해안 지방에 사는 모든 한인들 20만 명이 화물 열차에 태워져 허허 벌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추위와 굶주림 때문에 참혹하게 죽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 한인들의 본거지인 신한촌은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고, 남기고 떠난 빈집들에는 러시아 여러 지역에서 일자리를 찾으러 온 사람들이 들어앉게 된다. 그리고 무심한 세월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강제 이주 당한 지 6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1990년대에 소련 연방 체제가 무너지고 개방화되면서 살아남은 중앙아시아 이주민들과 그 후손들이 귀향을 하듯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모여들었다. 러시아와 한국 사이의 수교에 힘입어 한국의 여러 기업가들과 손잡고, 여러 가지 사업을 벌이면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새로운 '신한촌'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3.1 독립 선언 80주년을 맞은 1999년 '해외한민족연구소' 주관으로 러시아 고려인 연합회, 블라디보스토크 한인회와 중앙아시아 전 고려인들의 정성을 함께 모아 광복절을 기하여 '연해주 신한촌 기념탑'을 세우고 신한촌의 역사와 한민족의 얼을 다시 일깨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신한촌의 아픈 역사는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유색 인종과 고려인을 백안시하는 러시아인들에 의해 기념탑은 숱한 수모를 겪어야 했다. 탑역을 마구 훼손시키는가 하면, 이따금 탑신에 볼썽사나운 낙서를 해놓아 한인들의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주곤 한다고 했다.  심지어는 연해주 의회에서조차 탑의 유지와 보존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어 어려움이 크다고도 했다. 다행히 근래에 와서 대한민국에 대한 인식 수준이 높아지면서 각급 학교에서 한국어 학습 붐도 일고 있고, 이에 따라 기념탑에 대한 인식도 차츰 달라져 가고 있다고 한다. 신한촌의 아픈 역사를 설명하는 탑의 관리인 이웨체스라브 씨는 한국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달라지는 인식을 말하면서 비로소 입가에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탑 주위에 노란 민들레꽃이 송송 피어나 있다. 저 꽃이 지면 홀씨는 바람을 따라 멀리 멀리 날아 갈 것이다. 어느 땅에 앉아 몸을 묻었다가 봄이 오면 잎을 돋워 내고 꽃을 피우게 될 것이다. 살길을 찾아 국경을 넘어 이 땅으로 와 삶의 터전을 닦았던 사람들처럼, 몹쓸 바람에 불려 먼먼 땅까지 날아갔다가 다시 날아와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들처럼 샛노란 꽃을 새롭게 피울 것이다.

신한촌 사람들도 민들레처럼 다시 아름다운 꽃을 피워 낼 것이다. 봄이면 빛깔 고운 꽃을 피우는 민들레처럼 번성해 가는 조국과 더불어 탐스럽고 화사한 꽃들을 피워낼 것이다. ♣(2008. 5. 4. 조국으로 돌아가는 배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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