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보스토크의 밤 그리고 여성

-2008 원양 승선 실습 길에서·4



블라디보스토크의 밤은 항구의 불빛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바다에 어둠이 내리면서 불빛도 내려앉았다. 정박하고 있는 배에서 켜지는 불빛이며 언덕 위의 빌딩에서 비치는 불빛이 색색의 빛깔을 내면서 항구의 바다를 물들이고 있다. 부두를 나서 거리로 나간다. 뒷길의 어둠을 지나 큰길로 나간다. 현란한 네온사인이 눈길을 휘황하게 하는 여느 도시의 밤거리와는 달리 어쩌다 보이는 몇 개의 네온사인과 광고 전광판, 가로등과 빌딩의 불빛이 거리를 밝히고 있다. 네온사인이 빛을 내고 있는 곳은 거의 주점인 것 같다. 불빛은 요염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여성의 이미지를 비추고 술이 넘치는 잔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에이전트의 안내를 받아 어느 술집에 들어섰다. 문을 들어서자 로비 같은 공간의 정면에 외투를 맡기는 곳이 있고, 클럽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이 있다. 외투는 벗어 맡겨야 입장할 수 있다고 한다. 옷을 받아 든 관리인은 번호표를 주었다. 입구에는 큰 키의 건장한 청년 두 사람이 섬뜩해 보이는 눈길을 내리깔며 서 있었다. 고객을 보호하기 위해 서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곧장 시비라도 걸어올 것만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풍속도일까, 우리의 눈에는 씁쓸하게만 보이는 풍경이었다.

11시가 가까워 가는 시각이었지만 한 테이블에만 젊은 여성 둘이 앉아 술을 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플로어 너머에서 조금 빠른 템포의 음악이 폭발음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플로어에서 몇 테이블 건너 벽 쪽에 자리 잡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테이블에 손님이 늘어 가는데, 대부분 젊은 여성들이다. 여성들끼리만 오거나 남녀가 짝을 지어 온 사람들이다. 외투는 다들 벗어 맡기고 들어왔기 때문인가. 바깥 기온은 조금 서늘한데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모두 짧은 여름 옷 차림으로 노출이 심한 편이었다.

여성들의 차림은 매우 발랄하고 세련된 반면에 남성들의 차림은 허름한 점퍼에 청바지 차림이 대분이다. 여성들의 발랄함은 옷차림만이 아니다. 남성들에 대한 애정 표현도 발랄하게 하고 있다. 남성들은 여성들의 적극적인 애정 표현을 받아들이고만 있는 듯한 모습이다. 여성들은 애정 표현만 적극적일 뿐만 아니라 플로어를 차지하고 음악에 따라 몸을 흔들어 대는 사람들은 모두 여성들이다. 홀의 분위기는 여성들이 압도하고 있다.

자정부터 시작된다던 쇼가 삼십 분쯤 더 지나서 시작되었다. 손님이 더 많이 차기를 기다린 것 같다. 무희가 현란한 동작으로 춤을 추고, 남성 무용수들이 나와 절묘한 움직임으로 브레이크 댄스를 추었다. 관객들의 환호가 쏟아졌다. 괴성과 박수로 환호하는 사람은 모두가 여성들이다. 멀겋게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은 모두 남성이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밤은 오직 여성들만을 위해 어둠이 내리는 것 같았다. 우리도 블라디보스토크의 남성들과 함께 주눅이 들어 여성들의 활발한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여성들의 환호 속에 블라디보스토크의 밤은 새벽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여성들의 적극적인 모습은 밤만이 아니었다. 전차 운전자들은 모두 여성이고, 박물관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도, 백화점이며 마켓의 점원들도 모두 여성이다. 남자들은 다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다. 길거리에 다니는 여성들의 차림새가 모두 세련되고도 화려했다. 여성들만 보면 국민소득이 참 높은 나라인 것 같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여성들은 담배를 많이 피운다. 거리를 다니며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모두 젊거나 어린 여성들이다. 거리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 여성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남자들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어쩌다 눈에 뜨일 뿐이다. 남자들에게서는 세련된 차림새도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텁수룩한 수염에 부랑자 모습을 한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거리에서의 애정 표현도 여성이 주도하고 있다.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더 활기에 차 보인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양성평등이 아니라 여성우위의 사회인 것 같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밤도, 낮도 모두 여성들의 세상인 것 같다. 물론 이국인인 내 눈에 비친 모습이겠지만, 우리네와는 조금 다른 저들의 풍속도가 이채롭고도 신기할 뿐이다.

세상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저 모습들이 언젠가는 우리의 모습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 때 우리 남성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블라디보스토크의 밤을 보며 조금은 쓸쓸한 느낌이 드는 것은 고루한 편견 때문일까, 몽매한 무지 때문일까.♣(2008.5.4. 조국으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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