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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한 시간들이 쌓여 가고 있다. 갑판 위로 올라 가본다. 배는 정물화처럼 서 있을 뿐, 고장 난 영사기가 정지시킨 화면처럼 모든 것이 멈추어 있다. 들리는 것은 발전기 돌아가는 소리, 움직이는 것은 선수와 선미에 달린 깃발뿐이다. 바람이 불고 있다. 바람 따라 물결이 너울거린다. 물결을 일렁이게 하는 바람 때문에 배는 부두에 몸을 묶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의 체류 일정은 어제 오후로써 끝났다. 사흘 전 원양항해 체험실습을 위해 아이들과 함께 배를 타고 포항을 출발했다. 배는 오전 10시에 출항의 뱃고동소리를 남겨 놓고 항구를 떠났다. 그리고 줄기찬 항해를 계속했다. 망망한 대해를 가르며 순항의 질주를 하고 있었다. 때로는 밀려오는 너울 따라 배가 요동하는 것도 호사로만 여겨졌다. 낮이 지나고 저녁 무렵 물결이 거세지더니 커다란 파도가 일었다. 배의 요동도 심해지고 멀미도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을 따라 밤이 가고 아침이 오고 또 낮이 되었다. 드디어 육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멀고도 길었던 항해의 시간을 생각하며 환호를 쳤다. 배 위에서의 하루가 지난 저녁 무렵에 일본 땅에 발을 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일본에서의 체류 일정이 시작되고, 그 일정은 이틀 밤을
배에서 자고 먹는 사이에 흘러갔다. 예정된 일정을 마무리한
사흘째의 저녁 무렵에 일본의 스루가항을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바다가 평온치를 못했다. 일단 내일 아침으로
출항을 연기했다. 내일은 일기에 관계없이 부두를 비워주어야
한다고 했다. 정박한 채로 배에서 하룻밤을 더 자고 난
아침 하늘은 흐렸다. 바람이 불었다. 스루가항에서의 마지막
아침밥을 먹었 앵커가 잘 올라오지 않는다. 항구의 바다 속에 드리워져 배를 고정시켜 주었던 앵커를 거두어 올려야 하는데, 모터가 잘 돌지 않아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헤어지기가 섭섭해서, 별리의 마음이 서운해서 옷깃을 잡듯 스루가항이 우리를 잡는 것일까. 선원들이 힘을 모아 앵커를 올리고 보니 폐기된 굵다란 밧줄이 걸려 있었다. 우리를 잡는 것은 일본의 인심이 아니라 저 못 쓰는 밧줄이었구나. 배는
먼바다를 향하여 나아갔다. 이 항구를 들어올 때 펼쳐지던
풍경들 스루가항에
다시 닿았다. 정박하고 있었던 부두로는 되돌아가지 못하고
오고 싶다고 올 수 없고, 가고 싶다고 갈 수 없는 것이 바닷길이다. 바닷길은 하늘이 열어주는 길이다. 오늘 함께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은 늘 바다와 더불어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로 바다도 배도 원망하지 않는다. 다만 뭍의 일들이 궁금할 뿐이다. "내일은 배가 뜰 수 있을까요?" "기다려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선장은 내일도 출항 여부가 확실하지는 않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기상 상황이 발생하면 보통 하루 정도는 있어야 풀리기 때문에 내일 기다려 보자고 했다. "갈 길은 가야 하는데……." "바람이 자기를 빌어야지요." 이 바다에서 가야 할 길을 잘 가기 위해서는, 그렇다. 바람이 자기를 비는 수밖에 없다. 그 기도를 하늘이 들어주시게 지성으로 비는 일밖에 없다. 무료의 시간이 아니라 기도의 시간을 쌓아가야 할 일이다. 어디 그뿐인가. 늘 바다와 친하게 살아야 하는 섬 살이의 나날도, 아니 우리 삶의 모든 날도 소망과 기도의 나날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니던가. "바람아 불지 마라, 불지를 마라."(2007.5.18. 스루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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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잘 있거라, 일본이여, 스루가항이여.
며칠 잘 기항하고 간다. 비록 부두의 울 속에 갇혀 있는
시간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가끔씩 문을 열어주어 이국의
풍정을 대할 수 있었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우리를 갇히게
한 것은 일본의 인심이 아니라 법의 제약 때문이라 이해하겠다.
어차피 우리의 목적은 항해에 있었으니 기항지의 법과 관습은
이해로써 삭히겠다. 이제 우리는 정답고 아름다운 우리의
조국을 향하여 먼 항해 길을 나서련다. 잘 있거라, 우리의
기항지여. 부두에 묶여 있던 밧줄을 풀고 뱃머리는 먼바다를
향해 돌려졌다. 
이 하나하나 지워져 갔다. 바람은 기세를 점점 더해
갔다. 갑판 위를 걸어 다니기가 힘들었다. 뱃머리 저 멀리서
너울이 밀려온다. 밀려온 너울은 뱃전에 이르러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고 부서진다. 배가 요통을 친다. 하늘로 떠올랐다가는
물 속으로 기어들 듯 내려앉는다. 그 요동 속으로 배는
물길을 그리며 항진을 계속했다. 멀미가 일기 전에 안정을
취하리라고 선실로 내려왔다. "배를 돌렸대요, 회항한대요!"
누가 선실로 뛰어 내려와 소리친다. 갑판으로 올라보니
뱃머리는 다시 항구를 향하고 있었고, 지워진 풍경들이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배는 다시 한 시간 가량을 달렸다.
포항에 연락해 보니 동해도 지금 풍랑주의보가 내려진 상태고,
이 바다에도 너울이 드세 할 수 없이 배를 돌렸다고 선장이
말했다. 특히 학생들이 타고 있기 때문에 무리한 항해를
할 없노라고도 했다. 
이웃의 화물선 부두에 접안할 자리를 겨우 얻었다고 했다.
배는 다시 몸을 묶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정지해 버렸다.
우리가 탄 배 옆에는 대형 크레인을 실은 커다란 화물선이
정박하고 있다. 무슨 괴물체 같다. 이 괴물체와 함께 하룻밤을
더 지새워야 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