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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어머니의 제사만 모시고 병실로 돌아왔다. 여느 설날 같으면 종형제 집으로도 제사를 지내러 가야하고, 제사가 끝나면 온 가족 모여 윷이라도 한 판 놀아야 할 일이지만, 얼른 병실로 가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입원을 하여 치료를 받고 있는 던 중에 설날을 맞아 의사의 허락을 얻어 외출을 나갔다가 돌아온 것이다. 어떤 환자는 설을 앞두고 퇴원을 하기도 했고, 어느 노인 환자는 나처럼 외출을 허락 받아 제사를 지내고 오기도 하고, 가까이 의탁할 곳이 없는 어느 환자는 줄곧 병상을 지키기도 했다. 설날의 병원은 다른 날보다는 한결 한산했다. 병실마다 환자도 적어 보이고, 면회객도 많지 않았다. 환부를 치료해야 하는데 의사가 좀처럼 오지 않는다. 환자가 적다고 해도 진료하는 의사의 수가 더 적은 모양이다. 의사인들 설날을 쇠지 못하란 법이 있으랴.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다. 설날의 병실엔 한동안 고요만이 흘러갔다. 갑자기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갓 돌 지났을 듯한 어린아이를 업은 젊은 엄마가 간호사와 함께 황급히 병실에 들어섰다. 설날을 앞두고 퇴원한 환자의 빈 침대 위에 아이를 눕혔다. 아이는 더욱 큰소리로 울었다. 불안과 초조가 역력한 엄마는 어딘지 모를 곳으로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떡국에 데었단 말이야. 2도 화상이래. 피부를 이식해야 할지도 모른대……" 엄마는 곧장 울음이 터질 듯한 얼굴이었다. 제사를 지내고 음복상 위에 떡국을 막 올려놓는데 아이가 달려들어 그릇을 집어 당겨 뜨거운 국물을 덮어쓰게 되었다고 전화기에 대고 누구에겐가 황급히 말했다. 벌겋게 물든 아기의 얼굴에는 테이프가 붙여져 있고, 손목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응급실에서 응급 처치를 받고 온 모양이다. 울기를 거듭하던 아기는 엄마가 업어주니 잠시 잠이 든다. 말 못하는 저 어린아이, 얼마나 고통이 심할까. 설날은 덕담의 날이다. 복 많이 받고, 건강하고, 하는 일 잘 되고……. 그 설날에 우리는 희망을 가진다. 올해는 좋은 많이 있을 것이라는, 그래서 행복도 평화도 잘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그런데 저 아이는 이 희망의 설날에 끔찍한 화를 당하다니, 이 설날이 저 아이에게는 평생의 상처로 남을지도 모르겠다. 무자년 설날. 내 환갑 해의 설날이다. 장수가 그리 어렵지 않은 오늘날은 육십 년 생애 환갑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지만, 어쨌든 삶의 한 고비를 넘어 지나온 생애를 돌아봄직한 나이임에는 틀림없다. 지난 생애를 돌아본다.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이루지 못했던가. 생각을 해 보건만 내 이러한 것을 이루었노라고 내 세울 만한 것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어릿광대의 어설픈 몸짓으로만 살아온 것 같다. 어느 날 뜻밖의 사고가 나고, 덜렁 입원을 하고, 수술을 하고, 병상에서 설날을 맞고……. 이 또한 어설프고 덩둘한 내 삶의 모습일 뿐이다. 환갑 액땜이라고, 모진 액땜일수록 좋은 일 많이 생기는 법이라고, 이제는 안락하고 화평한 노후를 보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설날 제상 앞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위로했다. 그럴까. 그리 될까. 내 앞 병상의 저 아이는 엄마가 먹여주는 과자를 먹으며 잠시 아픔을 잊은 듯 잘 놀고 있다. 저 아이에게는 이 설날이 생애 최초로 맞는 설날일 것이다. 첫 출발의 통과의례라 할까. 이 아픈 의례를 지나고 나면 더욱 튼튼히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건강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의 출발기와 결산기에서 맞는 저 아기와 나의 아픈 액땜, 그 통과의례에 희망을 걸고 싶다. 무한한 희망을 걸고 싶다. 병실에서 맞는 내 환갑의 해 무자년 설날-.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만한 곳
-김종길 : '설날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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