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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할 곳이 아무 데도 없다는 옆 병상의 노인에게 한 여인이 찾아왔다. 어느 사회단체에 속해 있는 간병사인데, 단체로부터 간병 지시를 받고 나왔다는 것이다. 노인은 몇 달째 입원하고 있어도 이런 일을 처음이라며 당황해 했다. 자기가 속한 단체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 무의탁 환자를 돕는 활동을 하고 있다며, 수당은 단체로부터 받으니 걱정 말라는 여인의 설명을 듣고서 노인은 안도하는 듯했다. 여인은 시키지 않아도 노인의 침상이며 사물함을 말끔히 정리를 해 놓고, 자꾸 주무시지만 말고 바람도 쐬자며 휠체어에 노인을 앉혔다. "최 노인 호사하네. 이런 좋은 일이 있을 수 있나!" 앞 병상의 김 노인이 부러운 듯 말을 건넨다. 교통사고로 몸을 다친 김 노인도 입원한 지가 몇 달이 되었다고 한다. "허허허……" 처음 들어보는 최 노인의 웃음소리다. 최 노인을 간병하기 위해 금요일에 찾아온 여인은 토, 일요일은 오지 않고 월요일이 되어서야 왔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5일만 근무하기 때문에 주말에는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월, 화요일 이틀을 최 노인의 병 수발을 든 여인은 다음 주 월요일에 오겠다고 했다. 수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설 연휴이고 그 다음은 주말이기 때문에 닷새 뒤에 온다는 것이다. "예, 그라이소."라고 하는 최 노인의 얼굴에는 전에 못 보던 쓸쓸함이 스쳐가는 듯했다. 사회 복지 차원에서 무의탁 환자에게 간병을 베푸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휴일이라고 간병을 멈추는 것은 행정 편의 위주의 야박한 시책인 것 같아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혼자서도 잘 견뎌오던 최 노인, 그 가슴에 오히려 구멍을 뚫어 놓는 일은 아닐지.
대학생 환자 한 사람이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금식' 표지판이 붙여지고 내일 당장 수술에 들어간다고 했다. 갑작스럽게 수술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중병인 것 같은데, 함께 온 부모는 그리 큰 걱정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학생은 이튿날 아침에 5시간 여에 걸친 수술을 받고 병실로 돌아왔다. 온 얼굴에 붕대가 감겨 있고, 안전 장구까지 채워 놓았다. "시간은 좀 오래 걸렸지만 잘 되었다니 다행이다." 어머니가 담담한 어투로 아들을 위로했다. 어디를 수술했느냐 물으니 입의 모양을 고쳤다고 했다. 태어날 때부터 입이 기형으로 생겨 불편도 하고 보기도 싫어서 교정 수술을 했다는 것이다. 막상 대학 졸업을 앞두고 보니 사회 생활하는데도 불편할 것 같아 수술을 결심했다고 한다. 두 번째 수술이라 했다. 밤이 되자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가고, 아버지가 아들을 지키고 있었다. 밤이 이슥해지자 아버지의 친구인 듯한 사람이 문병을 와서 부자를 위로했다. 걱정이 많겠다며 피로도 풀 겸 나가서 한 잔만 하자고 하는 친구를 따라 아버지는 병실을 나갔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학생의 아버지는 빈 병상에서 한잠이 들어 있었다. 아침밥은 아들 혼자서 받아먹었다. 아버지가 놀란 듯이 깨어나자 얼굴에 붕대를 감은 아들은 "괜찮아요. 더 주무세요."하고 웃었다.
"저런 병이라면 차라리 낫지" 아내가 말했다. 내가 수술을 받던 그 날, 그 시간을 생각하면 너무도 끔찍하다고 했다. 그 때 나는 아침 9시 좀 넘어 수술실로 실려 갔다. 전광판에 떠 오른 내 이름 옆에 '수술중'이라는 표지가 붙은 것은 9시45분이었다. 아내는 2시간 정도 걸린다는 수술이 끝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 시간이 왜 그리 안 가는지 혹 어찌될까 싶어 온몸이 떨리더라고 했다. 수술하기 전에 의사가 만에 하나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며, 그런 경우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고 한 것을 생각하니 불안하여 견딜 수가 없더라는 것이다. 수술이 끝나면 일단 전광판에 '회복중'이라는 표지가 게시되다가 보호자를 불러 환자를 인계하는데, 어떤 환자는 회복중이라는 표지도 나타나지 않는 상태에서 보호자를 부르기도 했다. 그 때 수술실로 들어간 보호자는 모두 오열을 터뜨리며 수술실을 나왔다. 환자의 상태가 심상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했다. 수술에 들어간 지 3시간쯤 된 12시 반경에 '회복중'이라는 표지도 나오지 않는 상태에서 내 이름을 부르더라는 것이다. 설마……. 순간 병원 천정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고 눈앞에 커다란 벽이 막아서는 것 같더라고 했다. 간호사의 부축을 받아 수술실로 들어서니 "수술 잘 되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라는 의사의 말이 들리는 듯했지만 거짓말인 것 같았다고 했다. 나는 아무런 기억도 없다. 깜빡 잠이 들었던 것 같은 느낌뿐이었다. 눈두덩과 머리가 몹시 아픈 것을 느끼고서야 내가 수술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말도 말아요, 당신을 두고두고 원망할 뻔했어요." 수술 순간을 회상하는 아내의 얼굴에는 안도와 비감, 희열과 고단이 함께 범벅이 되어 엉클어져 있었다. 내 아픔이 아내에게로 곱다시 전이되고 있는 듯했다.
한동안 몹시 칭얼거리다가 깔깔거리기도 하던 앞 병상의 아기 환자는 지금 새근새근 자고 있다. 온 얼굴에 감겨져 있던 붕대도 풀었다. 설날인 어제 설상에 놓인 떡국을 엎질러 얼굴과 손목에 커다란 화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말 못하는 저 어린것이 고통인들 얼마나 심하랴, 저 아이의 가볍지 않은 상처를 바라보고 있는 엄마는 또 얼마나 가슴이 아프랴. 다행히도 참으로 후덕하게 보이는 엄마는 충격과 아픔을 잘 이겨내고 있는 것 같다. 속도 넓어 보이고 생각도 깊어 보이는 엄마다. 잠시 눈물을 짓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내 표정을 가다듬으며 아기를 보듬어 안아 어르고 다독거린다. 치료를 받을 때는 자지러지게 울던 아이가 저를 얼러 주는 엄마를 보며 방긋 웃기도 한다. 아이도 둥실하게 잘 생겼다. 엄마가 자정을 이기지 못해 아이 앞에서 눈물과 한숨을 터뜨리곤 한다면, 말 못하는 아기일지언정 얼마나 불안하고 고통스러울 것인가. 아기에게도 느낌은 있을 것이다. 엄마는 아기와 함께 하룻밤을 병상에서 지냈다. 아기의 입원은 곧 엄마의 입원이다. 엄마도 아기와 병상의 밤과 낮을 함께 겪을 수밖에 없다. 아이의 상처는 차차 호전되어 갈 것이지만, 하루 이틀 만에 병실을 나설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빨리 회복이 되어야 하겠지만, 설령 치료기간이 좀 길어진다 해도 엄마는 잘 견뎌 낼 것이다. 저 엄마의 의연하고 따뜻한 사랑이 아기의 상처를 씻은 듯이 낫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통사고로 팔다리를 다쳐 입원 중인 김 노인의 집은 울진이라고 한다. 대구에서는 한참 먼 곳이다. 아들, 딸 형제 다 있다지만 요즈음은 면회객도 뜸하다. 몇 달째 입원을 하고 있다가 보니 아들딸인들 늘 와 볼 수야 없는 일이지만, 나와 함께 일주일 넘게 같은 병실을 쓰면서도 찾아오는 친인척을 별로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김 노인은 결코 쓸쓸해 보이거나 외로워 보이지도 않는다. 텔레비전에 자막이 나오면 따라 읽기도 하고, 노래가 나오면 따라 부르기도 한다. 드라마를 보면서는 배우의 역할에 따라 웃기도 하고 해설을 보태기도 한다. 때로는 듣는 사람이 있든 없든 혼자서 지껄이다가 어느 새 깊은 잠에 빠지기도 한다. 군인들 이야기가 나오면 자신의 군대생활을 회상하기도 한다. 육이오 무렵에 군대생활을 했다면서, 그 때 비하면 요즈음 군대는 군대도 아니라며 호기롭게 말했다. 나이가 비슷한 앞 병상의 최 노인에게 일본말을 섞어 가며 농담도 걸기도 한다. "아들딸 다 우째 버렸어? 할마이는 와 보냈노?" 최 노인도 귀에 익은 농담인 듯 빙그레 웃기만 한다. 면회 오는 사람은 별로 없어도 어디 어디에 전화를 하여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느냐 묻기도 하고, 어찌 어찌하라 이르기도 한다. 어제 설날엔 대구에 사는 종형제 집에 다녀오기도 했다. 김 노인이 병을 이겨내는 방법인 것 같다. 가족이나 친지가 와 보려 해도 모두들 바삐 사는 사정을 생각하여 굳이 오지 말라 했거나, 와서 위로 줄 사람이 마땅히 없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경우일지라도 누굴 탓하지 않고 누구에게 기대지도 않고 자신의 의지만으로 병을 극복하려는 것 같았다. 김 노인은 칠순의 나이답잖게 정정한 기력을 보이고 있다. 스스로 병을 이겨내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기에, 그것이 기력을 정정하게 하는 것 같았다.
병도 여러 가지이지만, 병실을 지키는 사람들의 모습도 갖가지다. 병실 사람들만 그러하랴. 세상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모두 다르다. 그러나 병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공통된 생각 하나를 가지고 있다. 모두가 병이 어서 낫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잘 나을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때로는 모진 고통에 신음을 하면서도, 이리 고통스러울 바에야 차라리 삶을 마감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희망은 늘 갈무리해 놓고 있는 것이다. 고통이 있기에 희망도 있다. 희망이 있기에 살아 있다. 병실 사람들은-.♣(20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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