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의 경고를 어겼다

 

의사의 경고를 어겼다. 의사가 오르지 말라는 산에 오르고 말았다.

어쩌다 척추에 금이 가는 변고를 당했다. 십여 일 입원하면서 갈라진 금을 붙이는 치료를 하고, 퇴원하고서도 계속 가료 중이다. 산은 평지보다 허리에 더 무리한 힘이 가해질 수 있고, 때에 따라 치명적인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고 했다.

기동할 만할 즈음부터는 잠시간씩 걷는 것도 회복에 도움 되는 일이라기에 순탄한 길을 잡아 조금씩 걸었다. 늘 다니던 강둑길로 나가서 맑게 흐르는 물을 보며 위안 삼기도 하고, 고요한 골짜기를 걸으며 사색에 잠기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해가 바뀌어 겨울 가고 봄이 왔다.

시나브로 오는 봄과 함께 땅속에 묻혀 있던 상사화 둥근 뿌리가 잎 촉을 내밀기 시작하여 점점 자라 오르고, 두렁에는 하늘빛을 닮은 봄까치꽃이 자잘한 꽃들을 피워냈다. 강둑에는 노란 꽃을 피워낼 산괴불주머니가 잎부터 돋우어내고 있다.

저들이 저리 피어나자면 산 소식은 어찌 돌아가고 있을까. 겨울의 두꺼운 낙엽들은 그대로 쌓여 있을까. 나무들은 아직도 맨몸의 묵언 수행을 계속하고 있을까. 무슨 움이라도, 망울이라도 수줍게 틔워 내고 있을까.

때마침 야생화 전문 기자인 조선일보 김민철 논설위원이 국립중앙박물관 뜰에 찾아온 봄꽃 소식을 뉴스레터로 전해왔다. 거기에는 매화는 물론 돌단풍이며 미선나무꽃, 생강나무 노란 꽃이며 올괴불나무 꽃이 이른 봄을 수놓고 있다고 했다.

생강나무, 올괴불나무 꽃~!! 성냥개비 끝에 피어나는 불꽃처럼 갑자기 내 속 깊은 곳에서 그리움이 화르르 솟아올랐다. 내 늘 오르는 산에서 다른 어떤 푸나무들보다 가장 먼저 봄을 느껍게 해주던 꽃들이 아닌가.

서울 도심 한복판에 그 꽃 그리 핀 것을 보면, 내 산길의 그 꽃들도 이미 제빛 제 모습을 다 드러내고 있을 것이 아닌가. ‘무엇을 어찌하고 싶어 죽겠다.’라는 상투적 어구 속에 박제되어 있는 죽겠다라는 말이 내 속에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했다.

산으로 내달았다. 허리 보호대를 두르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발은 벌써 산어귀를 딛고 있었다. 내가 볼 수 없는 사이에 봄이 벌써 이렇게 가깝고도 깊게 와 있구나. 몇 걸음 오르지 않아 노란 꽃술을 뭉쳐 놓은 것 같은 생강나무 꽃이 물오른 가지에 송이송이 송송 달려 있었다.

생채기 진 가지에서 생강 냄새가 난다는 꽃나무, ‘사랑의 고백’, ‘영원히 당신 것이라는 꽃말을 가진 그 꽃, 정선아리랑 속의 동박, 김유정 소설 동백꽃속의 그 동백, 내 산길 속에서 봄마다 나를 가장 먼저 맞고, 내가 유달리 이뻐하던 꽃이 아니던가.

내 몸 어디가 아프단 말인가. 지난날 내 발자국이 살아있을 것 같은 길을 익숙한 걸음으로 디뎌 나아간다. 오름길 한 곳, 저 가녀린 나무 그 잔가지에서 보일 듯 말 듯 고개 숙인 꽃, 올괴불나무 꽃이다. 이른 봄, 내 산길에 생강나무 노란 꽃과 함께 나를 반겨주던 꽃이다.

나래 치듯 벌린 연분홍 꽃잎 속에 솟아난 꽃술, 그 끝에 달린 빨간 문채, 김민철 기자는 빨간 발레 토슈즈를 신은 듯하다 했다. 꽃말이 사랑의 희열이고 보면 그 희열로 경쾌한 발레라도 추고 있는 건가. 이 봄 이 꽃을 못 볼 양이면 내 희열 하나가 무참히 묻힐 뻔했구나.

내친걸음은 점점 가풀막진 곳을 향한다. 그 가풀막 위에는 내가 오로지하는 고사목 의자가 있다. 이승의 명을 다하고 누운 나무 하나가 수많은 미물의 집이 되듯, 나의 아늑한 의자가 된 것이다. 못 올라도 거기까지는 올라야 한다. 또 봐야 할 것이 있다.

다리와 스틱에 박차를 가한다. 드디어 고사목 의자가 보인다. 그보다 먼저 눈을 번쩍 뜨게 하는 것, 진달래가 언제 저리 곱게 피었는가. 막 벙글려는 것도 있지만, 활짝 피어 나를 향해 함박웃음을 짓는 것도 있다. 날마다 오를 적에는 움트고 망울지고 그 망울이 꽃으로 피는 걸 사랑스레 지켜봐 오다가 저 핀 꽃을 대하니 왜 이제야 오느냐?”며 외려 날 탓하는 것 같다.

진달래뿐이랴, 생강나무 꽃도, 올괴불나무 꽃도 마찬가지다. 날 얼마나 원망했을까. 아니 내가 너희들을 못 보고 이 봄을 넘겼더라면 내 속에 얼마나 아린 멍이 졌겠느냐. 이제야 그 멍을 조금은 지울 수 있겠노라며, 다시 보자 하고 산을 내린다.

내리는 걸음이 그리 무겁진 않았지만, 길이 완만해질 때쯤은 허리에 무슨 전류라도 흐르는 듯 저려 온다. 의사의 경고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오는 듯하다. 그 경고를 어긴 업보로 하루 이틀쯤은 허리를 곧추 펴고 누워서 앓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도리 없다. 보고 싶은 것 보고, 사랑하고 싶은 것 사랑했으니, 그 병통쯤이야 달게 겪어야 할 일이다. 살고 죽는 것도 그럴 수 있지 않으랴. 온 마음 바쳐서 하고 싶은 일을 한 연후에 한두 해쯤 일찍 세상을 떠나는 일이 있을지라도 무슨 아쉬움이 그리 남으랴.

그렇지만 의사의 경고를 남의 일같이 내칠 수는 없는 일이다. 내일은 고즈넉한 골짜기를 걸을 것이다. 세상 모든 소음은 사라지고 고요만이 가득한 그 골짜기, 모든 사랑도 그리움도 미움도 욕심도 다 내려놓을 수 있는 그 아늑한 골짜기로 들 것이다. (2024. 3, 20)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

 

강둑을 내려와 골짜기로 든다. 강을 품고 있는 강둑을 내리면 산골짜기로 드는 길과 들판으로 가는 길이 갈린다. 들길을 따라 집으로 갈 것을, 요즈음은 골짜기 깊숙한 곳까지 들었다가 돌아 나와 들길을 지나 집으로 향한다.

여느 때는 아침엔 들판과 강물을 옆구리에 끼고 강둑을 거닐고, 저녁 무렵엔 고샅을 지나 산으로 오르곤 했다. 산을 오를 수가 없게 되었다. 무슨 병 탓인지 갑자기 쓰러지면서 등뼈에 금이 갔다. 어려운 시술 끝에 금을 붙이긴 했지만, 산에는 오르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아침저녁의 걸음을 합쳐 강둑을 거닐다가 골짜기로 든다. 언덕 중허리에서 정한 물이 나는 샘골을 지나 속삭이듯 흐르는 도랑물 소리를 들으며 깊숙한 걸음을 옮긴다. 한 발짝 한 발짝 골의 깊이를 더해갈수록 세상이 달라져 간다.

바뀌어 가는 풍경 속에 눈 풍경만이 아니라 귀 경치도 점점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강둑을 걸을 때는 강 건너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소리가 강물 소리를 집어삼키곤 했다. 그래도 물이 아늑하고 물에 잠긴 풍경이 그윽하여 즐겨 걷곤 했다.

골짜기가 깊어질수록 세상의 차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더니 마침내는 모두 감감해져 버렸다. 요란하게 질주하던 소리들은 다 어디로 가버린 걸까. 오직 남아 있는 것은 도랑물 소리, 내 발길 소리뿐이다. 산의 나무들도 깊은 묵언행에 들어 있다.

도랑이 곁에서 좀 멀어지자 아무 소리도 남지 않았다. 어쩌다 가녀린 새소리가 들려올 뿐, 세상의 모든 것이 멈추어져 버렸다. , 나도 멈추어지고 말았다. 발길도 고요 속에 얼어붙고, 머릿속을 끓던 잡념들도 뚝 끊기었다.

무서우면서도 편안하다. 세상에서 뚝 떨어져나온 것 같은 고독감이 두렵기도 했지만, 세상 모두 내 것이 된 것 같아 마음이 부요해지면서 고즈넉해 온다. 마음에 무슨 근심이 있고 걱정이 있으며, 몸에 무슨 지장이 있고 병이 있는가.

법정 스님은 출가란 단순히 집에서 나온다는 말이 아니라. 온갖 세속적인 모순과 갈등과 집착의 집에서 훨훨 미련 없이 떨치고 나온다.’(물소리 바람 소리, 가사 입은 도둑들)라는 뜻이라 했다. 그러고 보니 이 순간만은 내가 고결한 출가승이 된 것 같다.

마음이 어찌 이리 아늑해지는가. 깊숙한 골짜기의 이 정밀이 어찌 이리 포근한가. 그래서 노자가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 이를 일러 미묘한 모성이라 한다.’(도덕경, 6)라고 한 건가. 이 골짜기가 그야말로 어머니의 품같이 포근하다.

이 품은 괴로움도 즐거움이 되게 하고 불행도 행복으로 바꾸어 줄 것 같다. 아니 그렇게 되게 하고 그렇게 바꾸어 준다. 나는 지금 외기러기가 되어 고단하게 살고 있다. 거기다가 불의의 병마까지 덮쳐와 육신의 통고와 함께 지내고 있지 않은가.

한 줄기 빛이 비쳐왔다. 몸도 처지도 어려움 속을 헤매고 있다는 걸 알고, 건강을 보살펴주는 기관에서 내 심신을 기르고 도와줄 이를 보내주었다. 아침나절 짧은 동안의 일로 하루 일을 다 채울 듯 성심을 다해 살펴준다. 나는 지금 불행 속의 행복을 누리고 있다.

이 골짜기에서는 모두가 행복이다. 불행도 행복이 되고, 행복은 더욱 따뜻해진다. 괴로움은 즐거움이 되고, 즐거움은 더욱 아늑해진다. 아니다. 불행도 행복도 없다.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다. 이 원시 고요 속에 무슨 고락이며 행불행이 따로 있으랴. 평온이 있을 뿐이다.

고요를 지고 품으며 골짜기를 나선다. 배웅해 주는 고요의 온기가 등을 어루만지는가 싶더니 안긴 고요가 체온을 남기며 하나둘씩 손을 흔든다. 도랑물 소리가 조금씩 살아나고, 세상이 가까워질수록 자취를 감춘 소음들이 민낯을 드러내며 다가온다.

소리는 점점 소란스러워진다. 고속도로가 보이면서 소리의 세상으로 변한다. 골짜기로 들 때 들려오던 소리보다 조금은 부드러워진 것 같다. 듣고 넘길 만하다. 모든 것을 평화롭게 하던 골짜기가 세상 속진에 너그러울 수 있는 아량을 준 건지도 모르겠다.

골짜기를 나와 들길을 걸어 집으로 간다. 집에 들면 앓고 있는 병과 다시 마주해야 하고, 그것에 이기기 위해 약을 먹고 허리 보호대를 다잡아 챙겨야 할 것이다. 괴로움과 즐거움이 나누어질 것이고. 행복과 불행이 갈라질 것이다.

괜찮다.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 하지 않았는가. 영원하다는 말이다. 나무며 풀이며 벌레며 짐승이며 물과 바람 그 모든 것을 품고 있는 그 모성의 품도 영원할 것이다. 고락이 나누어지고, 행불행이 갈라질 때면 나도 한 마리 짐승이 되어 그 영원의 품으로 들면 된다.

아침이면 찾아오는 이가 나의 골짜기다. 나의 병구를 안아주는 집 안의 골짜기다. 내일도 강둑을 지나 골짜기로 들 것이다. 고요가 모든 것을 보듬어주는 골짜기, 내 세상의 골짜기다. 골짜기는 내 가난한 행복이다. 언제 안겨도 포근히 맞아줄 행복을 찾아간다.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2024. 2. 25)

                                                                     

 

내일은 거뜬히

 

혼자 끓여 먹고 하느라고 뭘 옳게 먹었겠나.……형님의 물기 어린 목소리가 전화기를 적시며 흘렀다. 며칠 후에 형님 내외와 여동생 내외가 길을 접어 달려왔다. 영양가 있는 먹거리를 잔뜩 챙겨왔다. 내가 쓰러진 건 못 먹어 난 병이라며 홀로 사는 내 처지를 가슴 아파했다.

어쨌든지 잘 챙겨 먹고 빨리 나아야 해.” 십 년 맏이 형님이 근심 어린 눈빛으로 입가엔 미소를 지으며 손을 잡았다. “오빠! 우리 집에도 한번 놀러 와야지.” 남매들의 걱정에 눈시울이 화끈거린다. 주위를 위해서라도 병을 잘 다스려야 할 것 같다.

갑자기 쓰러져 혼절에 이르러면서 몸 한 부분에 금까지 가게 되는 중병을 얻었다. 큰 도시 큰 병원에 몸을 눕히고, 빈사지경에 이른 몸에 난치 과정을 거쳐 두어 주일 만에 병원을 나왔다. 이제부터 내가 해야 하는 치병, 구병의 시작이었다.

홀로 조섭해야 하는 처지가 고려되어 건강 관리기관에서 사람을 보내주었다. 그 요양 덕분으로 치병은 잘 이루어져 갔지만, 하루 이틀에 좋아질 일은 아니었다. 구병이 이어지는 동안 나만 아픈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의 마음을 편치 않게 하고 있었다.

지역의 선배 어르신들이 평소 내가 좋아하던 것들을 들고 달려왔다.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며 어깨를 쓰다듬었다. 어르신들의 문병을 받는 게 도리가 아니라며 겸연쩍어하자, ‘그러면 아프지 말아야지.’ 하고 껄껄 웃으셨다.

나도 따라 웃었다. 웃는 사이에 잠시나마 아픔이 잦아드는 것 같았다. 웃음이 좋은 약인 것 같다. “한잔하러 가지 않으실랑가? 그 집(단골집) 막걸리가 다 쉬고 있을 텐데.” “그럽시다. 지금 병이 다 나아버렸습니다. 하하유쾌한 위로였다.

이웃들도 가만있지 않았다. 수시로 병을 물으면서 병치레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이것저것 챙겨왔다. 먼 길 친지들도 연이은 위로 전화와 더불어, 된 걸음 마다치 않고 달려오기도 했다. 어느 지인은 부부 함께 와서 맛난 먹을 것과 함께 따뜻한 위로의 정을 건넸다.

수필 공부로, 시 낭송으로 인연 맺고 있는 분들 대여섯이 달려왔다. 회장님은 손수 만든 갖은 반찬을 내놓는가 하면, 어떤 분은 내가 좋아하는 추어탕을 마련해 왔다. 병고 달래라고 고소한 강정이며 소복에 좋다는 영양 과일들을 쏟아냈다. 내가 무얼 한 게 있다고 이러시는가.

내가 먼저 사과했다. 와병으로 예정된 수필 공부를 함께 못하게 되어 면목이 없노라 하니, “그래요. 해주셔야지요. 내일이라도 해주세요.” 맛난 과일을 들며 모두 웃었다. “저도 몸이 근질근질합니다.” “병도 작품이 될 테지요? 하하

순간, 내가 환자가 맞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몸의 중심도 잡기 어렵고 어지러워서 차를 잘 탈 수도 없다고, 그래서 어디를 갈 수가 없다며 모임을 알려온 친구들에게 말한 내가 맞는가 싶었다. 후딱 일어서서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내 모습이 환영으로 새겨진다.

문병객들이 모두 돌아갔다. 그 고마운 사람들과 어울려 잠시나마 아픔을 잊을 수 있던 시간들이 꿈속의 일만 같았다. 그 꿈속의 일이 현실이기를 바라며 자리에서 일어서보니 좀 어지럽긴 했지만, 훨씬 나아진 것 같았다.

그런 나날, 시간들이 흘러가는 사이에 몸과 마음은 조금씩 원기를 찾아갔다. 굴신을 못 했던 퇴원 당시를 돌아보면 엄청나게 좋아진 것 같다. 깊은 잠에서 기분 좋게 깨어난 것처럼 머잖아 기지개 산뜻하게 켜고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조금씩이나마 기력을 회복할 수 있게 해주는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하루 중 잠시나마 와서 도와주는 분의 정성을 받아가며 빠뜨리지 않고 복용하는 약의 효용도 있겠지만, 고적한 와병 생활 속에서 따듯한 관심과 정성을 안겨준 분들의 위로도 큰 힘이 되는 것 같다.

아이들은 모두 품을 떠나 있고, 가장 가까운 식구마저도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려, 홀로 적적히 사는 생활이 병의 가장 큰 원인이 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 터에 온기 어린 관심으로 적요한 말길을 틔워주는 분들이 구병의 가장 좋은 힘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분들을 볼 때면 내 살아온 날들이 돌아 보이는 건 무엇 때문일까. 나는 누구 병을 앓고 있는 이를 진정으로 걱정하며 그들 병 자리를 찾아본 적이 있었던가. 내 붙이며 혈친들 말고는 별로 그리 못 해본 것 같다. 그런 내가 많은 분의 관심을 받아 기력을 찾아가고 있다니.

남의 정 어린 관심 받을 만한 일도 못 한 내가 그런 관심을 얻고 있다고 생각하니 얼굴에 화기가 돈다. 나는 왜 그리 푼푼한 마음, 넉넉한 뜻을 가지고 살아오지 못했을까. 인제부터라도 따뜻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누워서 보는 창밖 하늘이 새롭다. 오늘따라 더 푸르게 더 높게 보이는 것 같다. 수필 동호인들에게 삶이 곧 글이라며, 잘 살아야 좋은 글도 쓸 수 있다고 했었다. 나는 잘 살고 있는가. 내 말에 대한 부끄러움을 조금씩이라도 덜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하리라.

선배 어르신, 그 집 막걸리가 다 쉬어 간다고 하셨지요? 기다려 주세요. 곧 가뿐하게 달려가 멋지게 한잔 올리겠습니다. 잔 속에 철철 담아 넣던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더욱 푸근해지도록 애쓰겠습니다.

몸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다. 내일이면 거뜬히 일어날 수 있을 것 같다. (2024.2.4.)

                                                                

 

변화 앞에서

 

살아가면서 어떤 사건이나 사실을 계기로 삶의 방향이나 해야 할 일이 달라지는 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전에 비해 후가 긍정적, 희망적으로 달라질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에 따라 행복해하거나 불행을 느끼기도 한다.

나도 살아오면서 숱한 그 계기를 맞이하면서 울고 웃어왔다. 그 연속이 삶의 과정이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들 그렇게 살아왔겠지만,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가 분별이 잘 서지 않는 변화 앞에서는 또 어찌해야 하는가.

갑작스러운 입원을 하게 되었다. 홀몸이 되어 적요하게 살던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벽에 부딪히며 쓰러지는 충격으로 외상도 입으면서 뼈 한 부분에 금이 갔다. 구급차를 바꿔가며 실리기를 거듭하여 도시의 어느 큰 병원 병실에 눕게 되었다.

몸 한 부분에 부족하다는 영양소 한 가지가 혼절할 정도로 큰 병이 되게 할 줄은 몰랐다. 의식을 겨우나마 찾게 되기까지, 찾은 의식을 정상으로 돌리기 위한 섭생에까지 그리도 숱한 나날과 힘든 공력이 들어야 한다는 건 더욱 몰랐다.

금이 간 뼈를 붙게 하는 일은 세상에 더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죽음은 차라리 아주 편한 일 같았다. 그 고통의 시간이 길지 않은 것은 다행한 일이었지만, 그 고통은 보호대를 힘들게 차고 지내야 하는 숱한 나날을 맞게 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입원의 시간을 보내고 퇴원했지만, 병으로부터 해방은 결코 아니었다. 여느 때는 쓸 일 없었던 침대가 방바닥과 나를 떼어놓게 했고, 내 몸 추스르는 데 나라의 도움을 받기에 이르러야 했다. 퇴원 후 내 생존의 달라진 모습이다.

퇴원해 누운 집에 침대가 들어왔다. 어색했다. 몸이 바닥을 두고 어디를 떠다닌다는 말인가. 바닥과 몸은 하나여야 하는 줄로 알았었다. 침대는 내 몸을 바닥에서 분리했다. 그 분리가 편리를 가져다주는 데 이르러서 내 상식은 깨어지고 말았다. 또 하나의 바닥이 생겼다.

침대는 제힘으로 일어나기 힘든 몸을 버튼만 누르면 일으켜 세워 준다. 들기 힘든 다리도 들리게 해준다. 참으로 편리했다. 내가 맞이한 새로운 문명이다. 그 문명은 나를 순치시켰다. 나는 점점 침대가 없이는 불편을 느끼는 존재가 되어갔다.

이 병 다 나아도 침대와 함께하고 싶다. 포근한 쿠션도 나를 매료시킨다. 방바닥의 은근한 온기가 그립기는 하지만, 그건 전기의 힘을 빌리면 된다. 따뜻하고 폭신한 감촉에 나는 잘 길들고 있다. 퇴원이 나에게 준 커다란 편리다.

나라 사람의 건강을 관리하는 기관에서 등급을 주었다. 그에 따라 내 생존을 도와주는 이가 내게로 왔다. 제힘으로 치러야 할 의식주에 관한 일상사를 혼자 힘으로 감당하기 힘들다고 도와주는 것이다. 고마운 일이다.

천성이 아주 너그럽고 헌신적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에 거기에 걸맞은 사람을 가려 보내준 건가. 내 복으로 그런 사람을 만난 건가. 하루에 제한된 시간을 나와 함께하면서도 게 불편하고 부족한 게 없을 만치 일을 잘 치러낸다. 그저 행복할 뿐이다.

침대는 나를 편리하게 해주고, 나를 도와주는 그분은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 그 편리와 행복은 퇴원한 나에게 주어진 커다란 행운이다. 이 행운 앞에서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마냥 웃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웃고만 있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을 때가 있다. 내 몸의 움직임을 왜 다른 것에 의지해야 하는가. 내 일상사를 왜 다른 이의 손길 속에서 치려 내야 하는가. 비감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솔직히, 다행스러운 느낌도 없지 않다. 힘 별로 안 들이고 몸을 움직이게 해주는 건 다행 아닌가. 권속이 다 곁을 떠난 고적한 처지에서 도움도 고맙지만, 잠시나마 말벗이 있다는 것도 다행한 일 아닌가. 오래오래 곁에 있어 주면 좋겠다. 입원의 혜택이라 해야 할지.

머리를 흔들며 잃었던 혼을 다시 깨쳐본다. 지금 그 혜택이 나에게 왜 주어지는 걸까. 마냥 그 자리에 편히 머물라고 주는 걸까. 내 비록 황혼기를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만 내내 살아도 되는 걸까.

그렇다. 어쩌면 그 혜택은 입원 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계시일지도 모른다. 여느 때의 모습으로 돌아갈 힘을 길러주기 위해 내게 와 준 것일지도 모른다. 그 계시를 나는 알아채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내 의지만으로 일어날 수 있기를 애쓰고, 내 힘만으로 생활해나갈 수 있기에 공을 들여서 그렇게 될 때, 침대의 효능과 도움의 효용은 더욱 빛날 수가 있을 것이다. 설령 그 침대를 계속 쓰고, 그 도움과 함께 살아갈지라도 자력 의지를 잃어서는 안 된다.

침대로부터, 고마운 분으로부터 받는 도움들은 입원 전과 후의 가장 큰 변화다. 그 변화가 또한 나를 돌아보게 한다. 나의 입원 전 일상적 모습에 대한 상념을 더욱 깊게 만들어 준다. 입원 전에는 지나쳤던 상념, 어떤 모습이 나인가, 무엇이 내가 해야 할 일인가.

심신의 건강을 찾아가는 일이다. 찾아야 하는 일이다. 누워있을 수만은 없다. 일어나 조금씩 걷는다. 지난날의 그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간다. 걸음에 익었던 길이다. 푸른 하늘에서 노을을 곱게 그릴 밝은 햇살이 내리고 있다. (2024. 1. 27)

                                                                     

 

노을빛이 좋다 

 

저녁 노을빛이 좋다. 언제부터 좋아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특히 요즈음 들어와서 다홍으로 티 없이 곱게 물든 노을빛을 보면 그리운 이와 마주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오래된 사랑을 다시 따뜻하게 나누고 있는 것 같기도 하여 가슴이 설레기도 한다.

노을빛이 다 고운 것은 아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아침놀을 뿌리며 지상으로 밝게 솟아올라, 중천에 높이 떠 세상을 환히 비추다가 서서히 서녘을 붉게 물들이며 저물어가는 해라야 노을빛이 곱다. 구름을 털어낸 밝고 맑은 해일수록 노을빛도 고운 것이다.

그리 고운 노을빛을 보면 지나온 내 생애가 돌아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나는 어떻게 살아왔던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저물녘에 서 있지 않은가. 저 해처럼 한 번이라도 세상을 환하게 비춰나 보고 저물고 있는가. 돌아보이는 게 많은 걸 보면, 나도 늙긴 한 모양이다.

요즈음 보호사가 와서 내 지내는 일을 도와주고 있다. 도움이 필요한 노령자에게 국민의 건강을 관리하는 기관에서 보내주는 사람이다. 도움을 받으며 살아나가는 처지가 된 것이 서글프기도 하지만, 지금 그 사람은 나의 참 고마운 구원자임은 어쩔 수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119에 실려 가는 처지가 되었다. 지역 종합병원이 감당 못 해 도시 큰 병원으로 가야 했다. 무슨 영양소 결핍이라는 진단과 함께 쓰러지는 충격으로 등뼈에 금이 가 있다고 했다. 이중고를 안게 된 것이다.

오랜 날 병실 신세를 지다가 나왔어도 여느 일상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충분한 섭생과 관리가 필요하다 했다. 그 필요에 따라 하루에 잠시일망정 보호사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의식주며 성치 못한 몸을 다스려 나가고 있다.

오직 한 몸 홀로 살아가야 하는 시간들 속을 살고 있다. 붙이들은 성가하여 둥지를 떠난 지 오래고, 반려마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버렸다. 붙이들을 좀 더 성심으로 거두어 줄 걸, 그 반려를 좀 더 따뜻하게 안아 줄 걸, 하는 후회들만을 허공에 덧없이 날리고 있다.

딴은 힘을 다해 살아온다고 한 게 그렇다. 방장했던 시절,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도 내가 해야 할 일이면, 땀 흘려 하기를 애썼고, 응당 내가 해야 할 일이면 열정을 불사르며 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때는 주위로부터 작은 기림도 받아가며 보람을 안아보기도 했다.

그런 것들만이 내 전부라 치부할 때도 없지 않았다. 다른 것은 별로 돌보지 못하고 살아온 지난날들이 오히려 지금은 아픔이 되어 남을 줄이야. 별반 이루어 놓은 것도 없을뿐더러, 마음 따뜻이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사람도 마땅찮은 처지가 되어 있지 않은가.

기운을 잃고 쓰러지게 된 것도, 몸 어디에 금이 가게 된 것도, 모든 것이 내가 짊어져야 할 업보일 것이겠다. 모든 사리를 두루두루 잘 건사하며 살아왔다면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날까. 고통을 달게 받을지언정 누구를 탓하고 무엇을 원망할 것인가.

이 허물 많은 사람에게도 비쳐올 빛이 있었던가. 다행히 내 생존의 일을 도와줄 이를 잘 만났다. 공간을 차지하여 먹고 입고 하는 데에 손쓸 일이 좀 많은가. 가려운 데를 어찌 알아 시원하게 긁어주듯, 내가 치루기 어려운 모든 일을 잘 챙겨주고 있다. 고마울 따름이다.

그는 나와 혈족도 아니고, 가약으로 맺어진 사람도 아니거늘 어찌 이리할 수 있는가. 타고난 품성인가, 따뜻하게 살려는 애씀인가. 오늘도 그는 아침 일찍 나에게로 와서 제반사를 알뜰하게 챙겨주고, 하루 지낼 일을 마련해 놓고 내일을 기약하곤 집을 나선다.

그를 대할 때마다 내 살아온 이력이 자꾸만 돌아 보인다. 나는 누구에게 이리 따뜻하게 대해 준 적이 있었던가. 무엇에 살뜰한 마음을 쏟아 본 적이 있었던가. 그렇구나. 매사를 고마워하며 사랑할 줄을 모르고 살았구나. 이 늘그막에 철이 드는 걸까.

철이 진작 들었더라면, 쓰러지지 않아도, 금이 가지 않아도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 한 번 회한 어린 후회심이 들기도 하지만, 지나가고 흘러간 일을 돌이킬 수 없어 안타깝고 아쉬울 뿐이다.

도움 덕분인지 지난 모습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다. 그 도움이 나의 거울이 되는 하루하루를 고맙게 살아가고 있다. 그 하루하루 끝에는 저 해 저물어 서산을 넘듯 내 삶도 이슥해져 서녘 깊이 들게 될 것이다. 저 해는 고운 빛을 뿌리고 제 뿌린 빛 속으로 소곳이 들고 있다.

무엇을 더 소망하랴. 나도 저 해처럼 고운 노을빛을 뿌리고 싶을 뿐이다. 구름 낀 마음으로 저 빛 어찌 뿌릴 수 있으랴. 맑지 못한 심사로 저 빛 속을 어찌 들 수 있으랴. 따뜻한 마음을 돋울 일이다. 티 없는 심사로 살기를 애쓸 일이다.

저녁 노을빛이 좋고도 부럽다.(2024. 2. 22)

                                                                     

 

사선死線을 넘다

 

몸이 그토록 쉽게 무너질 줄은 몰랐다.

어느 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기침이 심하게 나고 머리가 빙 내둘리면서 나도 모르게 쓰러졌다. 잠시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쓰러지면서 벽에 얼굴을 부딪쳐 입술과 관골에 생채기가 지고 무릎에도 상처가 났다. 등도 무척 아팠다. 일어나려 했지만, 바닥을 짚을 힘이 없었다.

이러다가 죽는 게 아닌가 싶어 억지로 몸을 끌어 전화기를 잡고 119에 도움을 청했다. 구급차가 이내 달려왔다. 실려 가면서도 머릿속이 가물가물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도 이런 정신 상태를 거쳐 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지역 종합병원에 이르러 응급실로 갔다. 증세가 어떻냐고 묻는데 몽롱해지는 정신을 힘들게 추스르며 아픈 데를 말했다.

피도 뽑아 보고 엑스레이, CT도 찍었다. 독감에 나트륨, 전해질 부족 증세에 허리에 골절도 생겼다며 보호자 연락처를 물었다. 나에게 보호자가 있나? 아들 전화번호를 말해주었더니, 도시의 큰 병원으로 옮기는 게 좋겠다며 아들에게 연락한 모양이다. 잠시 후 아들이 큰 병원을 섭외해 놓았다고 연락이 왔다며 응급차를 주선해 주겠다고 했다.

차에 실려 가며 흐릿한 머릿속에서도 온갖 생각이 다 일었다. 내가 이런 일을 당하다니-. 몸속에 나트륨이 부족하다는 것은 소금기가 적다는 말이 아닌가. 환부鰥夫로 살면서 혼자 이것저것 챙겨 먹는 사이에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 영양의 불균형 때문에 쓰러지게 되고, 쓰러지면서 충격을 받아 허리뼈에 금이 간 것 같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에 아들이 사는 도시의 병원에 이르니, 아이들이 나와 있었다. 아이들을 보고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환자복을 입고 독방 병상에 누워있었고 팔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다. 독감으로 인해 감염 우려가 있어 일인실에 배치됐다 했다. 간호사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며 혈압과 맥박, 혈당을 측정하고 링거에 주사를 넣었다.

며칠이 지나자 여럿이서 쓰는 병실로 옮겨도 된다고 했다. 신장내과 치료가 끝나고 신경외과 치료로 넘어가 허리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죽을 고비 하나를 넘겼다 할까.

환자 네 명이 함께 쓰는 병실로 옮기자마자 수술실로 인도되었다. 허리 부분을 수술이 아닌 시술로 치료한다고 했다. 엎드리라고 하더니 허리 쪽을 무엇으로 찌르는 모양이었다. 죽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엄청나게 아팠다. 두 군데를 찔렀다. 그 구멍을 통해 시멘트를 집어넣는다고 했다. 시멘트가 굳으면서 금 간 허리뼈가 붙는다는 것이다.

치료를 마치고 났을 때는 온 얼굴에 땀범벅이었고, 죽었다 살아난 것 같았다. 병실로 돌아왔지만, 통증은 잦아들지 않았다. 허리 보호대를 주면서 누울 때 말고는 꼭 착용해야 하고 조금씩은 걸어도 된다고 했다. 며칠 후 퇴원하라고 했다. 조섭은 계속하여야 한다며 약을 한 보따리 주었다. 두 주일 후에 다시 와서 검진을 받으라 했다. 어쨌든 두 번째의 죽을 고비를 넘긴 셈이다.

나 혼자 이 아픔을 어떻게 감당해 낸단 말인가. 퇴원하여 아이들이 사는 도시를 떠나오자니 혼자 빈집에 들어갈 내 모습이 불안도 하고 처량도 했다. 그런 내 심정보다 아이들이 더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딸이 백방으로 알아보니, 내가 사는 지역에 재가노인복지센터라는 것이 있더라 했다. 거기에 의뢰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며 의뢰도 해놓았다 했다. 의료보험 공단에도 지원받을 길을 알아보고 있다 했다.

집에 와서 혼자 약을 먹으며 아픔을 다스리고 있는데, 복지센터에서 나와 내 상태를 묻고, 이어 보험 공단에서도 내 몸 상태를 점검하러 나왔다. 공단에서 나온 사람은 쉰 개도 넘는 문항을 가지고 질문하면서 신체 상태도 살폈다. 치매가 지원받기 가장 쉬운데 치매는 아니라며 돌아갔다. 십여 일 후에 등급이 나왔다며 공단에 와서 인정서를 받아가라 했다. 복지센터 관계자와 함께 가서 받아왔다. 2년 동안 유효하고 그 후에는 또 점검을 받아야 한다 했다.

수속이 완료되면 보호사 한 사람이 나와서 생활 전반을 돌봐 주는데, 경비의 대부분은 공단에서 부담해 준다 했다. 경비도 경비지만, 고적한 생활 속에서 하루에 잠시일지라도 누구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게 적이 마음을 놓이게 했다. 특히 아플 때 옆에 아무도 없다는 것은 얼마나 서러운 일인가.

두 주일 후 병원에 다시 가니 나트륨은 많이 채워졌다며, 약은 당분간 계속 먹어야 한다고 했다. 허리 부분에 대해서는 병원에 한 번 더 오라 했다. 내 병은 뭐가 부족한 것도, 허리가 탈 난 것도 모두 노쇠가 원인일 것 같다. 기력만 괜찮았다면 그런 일이 왜 일어날까. 누구나 겪어야 할 과정이긴 하지만, 내게 조금 빨리 온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지금도 나는 사선의 고개를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필요한 수속은 복지센터에서 해주기로 하고, 나는 그 조치를 기다렸다. 며칠 후 센터에서 보호사 한 분과 함께 찾아왔다. 반가웠다. 일신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도 반가웠지만. 아픔을 위로받을 수 있다는 것이 여간 반갑지 않았다. 고맙다 했다. 앞으로의 내 날들은 어떻게 이어질까. 상상만으로도 아픔이 조금은 덜어지는 것 같다. 그리하여 나는 국가관리 노인이 되어 가고 있다 싶어 공허한 웃음기가 돌았다.

몸도 성해야 하겠지만, 정신만은 맑게 살다가 가고 싶다. 보호사에 대한 기대도 크지만, 나 자신도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는 의식이 새삼스레 꿈틀거린다. 이것저것 골고루 챙겨 먹고 신체 운동도 열심히 해야겠지. 건강한 신체에 깃들 맑은 정신을 위하여, 다음 사선과도 친해지기 위하여-.

                                                                    

 

얼마나 달려가야

 

오늘도 산을 오른다. 나무에는 잎이 거의 다 떨어졌다. 푸르고 누르다가 떨어져야 할 철을 알아 모두 제 자리를 찾아내려 앉았다. 떨어지는 것은 잎새뿐만 아니다. 가지도 떨어진다. 뻗어 오르는 나무에서 가지도 제 할 일을 다 했다 싶으면 누울 곳을 찾아 내린다.

저렇게 내려앉는 잎과 가지들 가운데는 줄기가 보내고 싶지 않았는데도 줄기의 손길을 무정히 뿌리치고 내렸거나 무참히 베어내진 것은 없을까? 줄기의 마음이야 어떻든 제 갈 길을 찾아 가버리거나 아프게 떨어져 나간 것들은 없을까, 줄기에 깊은 상처를 남긴 채.

, 저 나무 저 모습, 누가 가지 하나를 무자비하게 베어버렸나. 나무는 그 상처를 끌안은 채 숱한 세월을 두르고 있다. 둥치는 그 상흔을 감싸듯 주위를 제 살로 둘러치고 있다. 얼마나 아프고 서러웠을까. 점점 깊어져 가는 상처만 오롯이 남아 있다.

저 둥치는 얼마나 안타깝고 아픈 시간들을 보내어야 했을까. 그 아린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지난날 가지가 달려 있던 자리는 상처가 굳고 굳어 골찬 옹이가 되었을 것이다. 아픔만큼 모진 옹이로 맺혔을 것이다.

이런 헤어짐의 아픔이 어디 나무며 그 줄기의 일일 뿐일까? 사람 살이도 마찬가지다. 사람 사이에도 만남도 있고 이별도 있고, 태어남도 있고 죽음도 있지 않은가. 이별이든 죽음이든 자연으로 가는 일도 있고, 그렇지 못하게 가야 하는 일도 있다.

어찌 가든 헤어진다는 것은 안타깝고 슬픈 일이지만, 순리에 따라가는 것이야 시간의 흐름 속에 그 아픔을 묻어갈 수도 있다. 헤어질 수도 없고 헤어져서도 안 될 이별이었다면, 그 아픔을 평생 안고, 아니 세상을 바꾸면서까지도 골수에 새긴 채 가기도 한다.

이별로 보내든 사별로 헤어지든 가슴에 결코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다면, 그 상처가 바로 아픔으로 굳어진 옹이가 아닐까. 그 아픔을 노래한 어느 가수의 옹이(조항조 노래)라는 노래가 대중들로부터 호응을 얻고 있다.

사랑에 불씨 하나 가슴에 불 질러놓고 / 냉정히 등을 돌린 그 사랑 지우러 간다 / 얼마나 달려가야 이 사랑 내려놓을까 / 어디쯤 달려가야 그리움도 놓을까 / 너무 깊어 옹이가 된 사랑 때문에 내가 운다 / …… 빼지 못할 옹이가 된 사랑 때문에 내가 운다.”

얼마나 달려가야,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러가야 그 아픔을, 상처를 다스릴 수 있을까. 한생이 다하도록까지 잊을 수도 지울 수도 없는 것이라면, 너무 야멸찬 옹이다. 대중가요의 정서란 사랑과 이별의 정한이 주종을 이루는 것이긴 하지만, 그런 아픔을 안고 이입된 감정으로 목놓아 부르는 사람은 없을까.

원곡 가수를 비롯한 유명 무명의 수많은 가수가 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만큼 이 노래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은 가사와 가락에 마음을 같이하면서 그 심금을 적시고 싶어서일 것이다.

이 노래가 나의 심금도 아릿하게 울려주고 있다. 나에게도 이 노래에 마음을 담글 만한 무슨 사연이며 사정이 있다는 말인가. 있은들 어찌 말로 드러내고 싶으랴. 말이 아픔을 덧나게 할 것도 같아, 다만 노래를 듣고 부르는 것으로 대상代償하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씩 이 노래를 듣기도 하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면서 토머스 하디(Thomas Hardy 1840~1928)거울 속을 들여다보네라는 시를 함께 중얼거려도 본다.

……세월은 나를 슬프게 하려고, / 어떤 부분은 빼앗아 가고, 어떤 부분은 남겨 두네. / 그리고 한낮의 두근거림으로 / 이 저녁의 허약한 뼈대를 흔드네.”

제목 그대로 거울 속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며 읊은 시다. 저 말대로 세월은 나를 슬프게 하려고 어떤 부분은 빼앗아 가고, 나만 이리 동그마니 남겨 두었는가. 그럴 때 나는, 황폐해진 거울 속 자신의 피부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차라리 / 내 심장을 저렇게 수척하게, 사그라지게 하셨더라면!”이라고 절규한 저 시인의 시구를 아릿하게 뇌어본다.

홀로 이리 서럽게 남아 있을 바에는 저 시인의 마음처럼 뛰고 있는 심장이라도 멎었으면 좋겠다. 세월은 나를 왜 이리 슬프게 하는가. 그렇지만 어쩌랴, 멎지 않고 사그라지지 않는 심장을. 노래로나 싸안을 수밖에. 내 가슴을 대상해 주기 바라면서-.

가지가 잘려나간 자리의 옹이를 다시 돌아보며 산을 내린다. 어쩌면 내 가슴속의 옹이일지도 모르겠다. 심장이 살아 있는 한, 그 옹이를 감싸주지 않고 어쩌랴. 그렇게 포근히 싸안아 보듬고 살다 살다 보면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는 날이 올까.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있다. 깊은 옹이를 품고 있는 저 나무도 심장은 살아 있다는 아린 몸짓일까. 얼마나 달려가야 이 사랑 내려놓을까, 어디쯤 달려가야 그리움도 놓을까.(2023. 12. 5)  

                                                 

 

쭈그러진 칡넝쿨

 

가을이 깊어가는 강둑을 걷는다. 줄지어 선 벚나무는 붉은빛 잎들이 떨어지면서 맨살을 드러내 가고 있다. 나무 아래 쑥부쟁이가 가을을 보내는 손짓인 듯 하늘거리고, 강물은 나무 그림자를 어루만지며 맑게 여물어간다.

저 나무의 칡 좀 보게나. 넓적한 잎을 쩍쩍 벌리며 넝쿨을 마구 감고 뻗어 대던 때가 언젠데 저리 말라 쪼그라들 줄이야. 지난여름 왕성하던 그 모습은 까마득히 사라지고 빛바랜 모습으로 우그리고 있는 자태가 처연해 보이기도 한다.

한때 칡넝쿨은 기고만장했다. 전후좌우도 돌아보지도 않고 아무 데 할 것 없이 마구 뻗어나고, 뻗어나는 곳마다 사정없이 감아댔다. 큰 나무든 작은 풀이든 가리지 않았다. 굵은 가지는 굵은 대로 칭칭 감고, 여린 풀의 잎이며 줄기는 목을 비틀 듯 감았다.

큼지막이 벌린 잎으로 볕살마저 가려 다른 것들은 숨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게 했다. 숲길이라도 걸을라치면 어김없이 발길을 잡는 것은 환삼덩굴 아니면 칡넝쿨이다. 환삼덩굴은 내치면 물러나기라도 하지만, 이건 기어이 발길을 잡아 넘긴다.

그렇게 세상을 살 때는 온통 제 세상인 줄 알았을 것이다. 못 오를 곳이 없고, 못 붙들 것이 없었다. 무엇이라도 제 갈퀴 안에 다 넣을 수 있지 않았는가. 무엇이라도 다 덮어 제 그늘에 넣을 수 있지 않았는가.

어느 당의 혁신 조직에서 최고 권력자와 가까이 지내는 정치인들에게 다음 선거에 출마를 사양하거나 어려운 곳에 출마하여 당을 도우라고 권했다. 그러자 어느 정치인은 오히려 백 대에 가까운 버스로 사천여 명의 지역 지지자를 동원하여 환호 속에서 세를 과시하더란다.

그에게는 아직 가을도 오지 않고, 겨울은 더욱 모르고 마냥 모든 게 짙푸른 여름을 누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음대로 못할 일이 없고 뜻대로 되지 않을 일도 없다는 듯 한껏 호기를 부리고 있는 것 같다. 마치 한창때의 칡넝쿨처럼-.

말라가는 칡넝쿨을 다시 본다. 그 한창때는 뻗으려고 하면 어디로든 뻗을 수 있고 감으려면 무엇이든 감을 수가 있었다. 그 마음 그 뜻 그대로 모든 것들은 뻗을 길을 내주었고, 크든 작든 어떤 것이라도 그의 갈퀴에 감겨들었다.

세상에 무엇이 영원한가. 무엇이 영원히 살 수 있고, 무엇을 영원히 누릴 수 있는가. 저 칡넝쿨 세상을 모르고 무섭게 모든 것을 감으며 뻗어 올라가다가 계절이 바뀌면 이리 초라해진다는 것을 내다 보기나 했을까.

시간이 흐르고 철이 바뀌면 변하고 쇠해 가는 게 어디 칡넝쿨뿐이랴. 사람도 나무도 풀도 모든 것이 성할 때는 성하다가 쇠할 때는 쇠하여 가기 마련이고 그러다가 죽고 소멸하고, 또 나고 자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도 저 칡넝쿨의 성쇠가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건 무슨 까닭일까. 성할 때 너무 호기를 부리지 않았는가.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고 제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버렸다는 것이다. 저 넝쿨에 몸을 묶이고 목을 조인 것들은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을까.

그렇게 겁나는 게 없었다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기세 좋게 살아 볼 일이지, 저 조락한 꼴은 무엇인가. 다른 나무의 잎들도 다 말라고 떨어져 가도 저만은 등등하게 살아야 하지 않은가. 지금은 오히려 다른 것보다 더 초라해져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지역민의 지지세를 과시하던 그 정치인의 그 힘은 영원할까. 그래서 누가 뭐라고 하든 눈치 안 보고 산다며, 모든 일은 자기 뜻대로 하겠다고 호언하고 있는 걸까. 저 칡넝쿨도 한철은 그랬다. 하고 싶은 것 다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계절의 변화는 비켜 가지 못했다.

누구든, 무엇이든 제 삶의 철이 있기 마련이다. 제철이 지나면 쇠락을 면치 못하게 된다. 제철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가리지 않고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걸 저 칡넝쿨에서 다시 본다. 그 삶의 뒤끝이 저리 을씨년스럽기까지 하지 않은가.

나를 본다. 지금 나는 제철을 다 보내고 내다 볼 일보다 돌아볼 일만 잔뜩 쌓인 계절 속을 살고 있다. 나는 편안하고 떳떳하게 살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고단도 하고 힘들어도 하면서 궁상스럽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제철을 철모르고 보낸 것 같기도 하다. 그 한때의 열정, 격정, 분노 속을 살면서 모든 것을 내 뜻대로만 하려 하며 살아왔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서 지금은 저 칡넝쿨 같은 모습이 되어 있는 것도 같다.

고대 로마의 대문호 키케로가 노년에 관하여에서 기력이 쇠하는 이유는 그저 나이 들어서가 아니라 젊은 시절을 방탕하게 보냈기 때문인 경우가 더욱 많다.’라고 한 말과 일맥상통한다고 할까.

어찌 생각하면 분노의 시간들을 흘려보낸 지금의 내 세월이 아늑하다 싶으면서도, 얽히고설킨 지난날들을 돌아보면 얼굴에 화기가 솟기도 한다. 저 말라가는 칡넝쿨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지세를 과시하던 그 정치인은 장차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이제부터라도 잘 물들고 싶다. 고운 빛깔 단풍으로 내려앉고 싶다. 마지막 저녁노을 빛처럼 곱게 스러지고 싶다. (2023.11.16.)

                                                              

 

단풍이 들 때 들고

 

오늘도 해거름 산을 오른다. 해거름 삶에서 해거름 산 오르기는 편안한 일체감을 주는 것 같아 걸음이 한결 아늑하게 느껴진다. 내 이 오랜 산행에는 늘 두 가지 기대와 목적을 품고 있다. 하나는 실용적인 것이고, 또 하나는 정서적인 것이다.

산을 오르고 내리는 사이에 내 고질인 고혈압, 고혈당이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이 산행의 덕이라 믿고 있다. 산을 걷다 보면 아프고 서러운 마음도 물 흐르듯 씻기는 것 같고,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상념들도 하나같이 단순해지는 것 같다.

이만하면 몸과 마음의 그 실용적, 정서적 기대와 목적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 것 아닌가. 그 충족을 즐거워하며 오늘도 가벼운 걸음으로 산을 오른다. 이렇게 하는 것은 오래 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곱게 죽기 위해서라며 늘 나 자신에게 말해주곤 한다.

낙엽이 발아래서 바스락거린다. 산에 단풍 빛이 비치는가 싶더니, 어느새 내려앉은 잎새들이 산을 정겹게 덮고 있다. 모두 들 빛이 들었다가 떨어져야 할 때 떨어져 제 자리들을 편안하게 잡아가고 있다.

세상에서는, 단풍 절정기를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풍경이 예년만 못 하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단풍 빛이 덜 들었거나 여전히 녹색을 떨치지 못한 나무가 많다는 것이다. 온난화 여파로 여름과 가을 사이날씨가 이어지면서 단풍이 제때 제 색깔을 못 찾았다 한다.

올해는 더위의 기간이 길어져 광합성을 멈출 때를 놓쳐버린 탓이라 한다. 견뎌내기 힘들지라도 더울 때는 더워져야 하고 추울 때는 추워져야 한다. 잎이 싱그럽게 피어날 때는 피어나야 하고, 물들 때는 들었다가 질 때는 져야 한다. 그게 자연의 순리지 않은가.

우리의 삶은 그 순리를 잘 따르고 있는가. 피어야 할 때는 잘 피어나다가 질 때는 곱게 져가고 있는가. 자연의 순리를 어그러지게 만드는 이상기후 현상이라는 게 자연이 지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것이고 보면, 사람들의 삶이 순리를 잘 지키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쉼 없는 걸음으로 산을 오른다. 어찌하였거나 물들 잎은 물들어가고 떨어질 잎은 떨어지고 있다. 진 잎은 흙에 몸을 붙였다가 언젠가는 그 흙 속으로 들 것이다. 저 나무 저 잎새들 다 지고 나면 맨살의 청정한 몸으로 다시 새로운 푸름을 돋우어 낼 것이다.

넘어가던 해가 나뭇가지 사이로 붉은 노을을 뿌리고 있다. 환히 밝힌 아침을 딛고 중천에 올라 세상을 한껏 안아 보기도 하다가 조금씩 내려앉아 내일 아침을 기약하며 저리 고운 노을을 뿌리며 져가고 있다.

저 노을 보니 내일도 아주 맑을 것 같다. 속담에도 저녁노을은 맑음, 아침노을은 비라 했고, 예수도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라 했다지 않은가.

살다 보면 반듯한 날도 어그러진 날도 있고, 외로운 날도 고독한 날도 있고, 사랑의 날도 미움의 날도 있을 수 있다. 모두 나의 날이 아니던가. 그런 날들을 안아 보기도 하고 내쳐보기도 하는 사이에 세월은 흘러가고 있다.

그 세월 속을 살아오면서 나에게도 저 나무들의 생애처럼 싱그런 푸름의 시절도 있었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시절이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어찌 있을까. 나에게 지금 그 시절은 아득한 전설로 흘러가 있는 것 같다.

오늘 해거름 산을 오르며 보는 붉은 하늘이며, 그 빛 속에 서 있는 나무며, 붉고 노란 물이 들어 떨어지는 잎새들이 마치 내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것 같다. 오늘의 내 모습을 비춰주기 위해 저 해 저리 붉은 기운을 뿜어 하늘을 물들이고 저 잎새 저리 떨어지고 있는 것 같다.

그렇구나. 이제 나에겐 떨어질 일밖에 남지 않았구나. 저 잎새 편안한 자리로 내려앉듯 나도 그런 자리를 보듬을 일밖에 없는 것 같구나. 미련은 없다. 잎도 단풍이 들 때 들고 떨어져야 할 때 떨어져야 하듯이 내 삶도 그렇게 되어야 할 것 아닌가.

나의 오늘도 저 하늘빛과 같은 선홍빛 고운 저녁노을이고 싶다. 그냥 말라가지 않는 선연한 빛깔의 잎새이고 싶다. 그리만 된다면, 언제 져도 더 상관할 일 없고. 어떤 자리에 앉아도 더 그리울 게 없을 것 같다.

맑고 고운 노을을 뿌리던 해가 산마루에 고즈넉이 내려앉는다. 노을이 고우면 아침이 맑다지 않은가. 내 삶도 그런 모습으로 그렇게 떨어져 내려앉다가 보면 내생 또한 맑지 않으랴.

저 하늘빛이 나의 빛이 되기를, 저 잎새 자리가 나의 자리가 되기를, 그 원 발길 속에 쟁여 담으며 아늑한 걸음걸음으로 저무는 산을 내린다. 그윽한 술 한잔하고 싶다. (2023.11.4.)

                                                                      

 

시의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제11회 구미낭송가협회 시낭송콘서트를 마치고

 

달은 가을 구월로 바뀌었지만, 여름 숲이 여전히 무성하던 202392일 토요일 오후 4, 열한 번째 시 낭송 콘서트가 시의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라는 주제를 걸고 지역 문화회관 무대에서 펼쳐졌다.

그 무대를 위해 당신이 찾아올 숲을 가꾸어야 했다. 생강나무 꽃이 겨우 움이 틀 이른 봄부터 회장을 비롯한 몇 사람들은 그 나무 심기 고민에 나섰다. 어떤 묘목을 어떻게 구해 어떻게 심고 가꿀까. 묘목이란 시고, 가꾸기는 프로그램 밭에서의 연마일 터이다.

독송, 합송, 윤송, 시 퍼포먼스, 시극 나무에 시와 가까운 수필 낭독 나무에다가 어린이 청소년 낭송 꿈나무도 가꾸기로 했다. 나무를 심고 물을 주고 북돋우어 주어야 했다. 좋은 묘목을 고르는 일도 쉽지 않았지만, 정성 들여 가꾸기는 더욱 힘이 들었다.

팀별로 나누어진 낭송 나무들은 함께 가꾸어 나가기 위해 아침 이른 시간도, 해 질 녘 어스름도 마다치 않았다. 어느 마을 정자도 좋고, 도서관 강의실도 괜찮고, 때로는 야외 공연장도 찾아서 어디서든 함께 만나 꾸준한 연찬으로 기량을 닦아 나갔다.

유창한 낭송과 함께 적절한 동작이 동반될 때 낭송의 운치가 한층 살 수 있다. 특히 시 퍼포먼스와 시극은 단순한 몸짓을 넘어 시의 흐름과 함께할 열정적인 연기도 곁들여야 한다. 그 구성과 안무 때문에 몇 날 며칠을 두고 고민도 토론도 치열하게 해야 했다.

그사이에 봄이 흐르고 여름이 갔다. 나무들은 쑥쑥 자라났다. 드디어 성목이 된 낭송 나무들이 무대에서 숲을 이룬다. ‘당신들이 모여든다. 따뜻한 발길로 찾아온 당신을 향해 꽃과 잎이 활짝 핀 숲을 이룬다. 시의 숲 향연이 펼쳐진다. 얼마나 고대하던 이 날 이 무대였던가.

프롤로그 오프닝 사운드로 트럼펫, 비올라 부부 연주가가 등장하여 잔잔하고도 정감 깊은 선율을 수놓는 것으로 무대의 개막을 알린다. 객석이 고요해진다.

그 고요 위로 협회 고문이신 전 회장이 오늘의 약속(나태주)을 낭랑하게 풀어내며 등장한다. 푸른 드레스 가슴에 핀 붉은 장미가 눈길을 잡는다. “남의 이야기, 세상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 우리들의 이야기, 서로의 이야기만 하기로 해요……그랬다. 오늘 우리는 세상사 다 제쳐 두고 시의 숲만 만들기로 한다. 현란한 박수 소리가 객석을 메운다.

사회자가 그리운 이름 하나를 주제로 하여 펼쳐지는 합송 무대를 소개하자 한 회원이 객석에서부터 천천히 걸어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김용택)를 읊조리며 울창한 숲이 우거진 무대의 영상 속으로 든다. 세 회원이 참 좋은 당신(김용택), 야생화(구은주), 가보지 못한 골목길(나태주), 그리운 이름 하나(용해원)를 앙상블을 이루어 낭송하면서 등장하여 분위기에 어울리는 몸짓과 함께 그리운 이름을 새겨나간다. 참 좋은 내 그리운 당신은 어디에 있을까. 객석의 어떤 이는 가슴에 조용히 손을 얹기도 한다.

회장이 오늘의 콘서트를 즈음한 인사를 한다. ‘제각기 서 있는 나무가 숲을 이루며 살아가듯이 우리도 따뜻한 인정을 나누며 더불어 살아가기를 소망한다.’라며 마치 한 편의 서정시를 낭송하듯 정겹게 인사한다.

박수 소리를 헤치면서 청바지 차림의 네 남자가 등장한다. 경상도와 전라도 사투리로 엮은 , 모구장 깃티마다 공가 놓곤 했던 그 대지배와 사발들은 지금쯤 어데 가 있을낑공?(상화구), 한 수 위(복효근)를 사투리 구수한 맛을 살려가며 코믹하게 낭송하자 객석에서는 시낭송 콘서트에서는 이례적이라 할 웃음보가 터진다. 관객들에겐 신선한 체험일지도 모른다.

웃음소리들을 딛고 어린아이 둘이 아장아장 걸어 나온다. 4학년, 1학년 남매가 나와 (정여민), 풀꽃(나태주)을 앙증스러운 목소리로 낭송한 데 이어 모두 다 꽃이야(류형선 사·)을 해맑게 부른다. 관객들의 박수 소리가 어느 때보다 커진다. 오늘 시의 숲 꿈나무들이다.

네 사람의 여회원이 등장하는 윤송 순서로 이어진다. 가정(박목월), 얼굴 반찬(공광규), 엄마의 회초리(길영수), 나의 어머니(신달자) 등의 시구절들을 극적인 연출로 주고받으며 가정, 가족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무대에 준비한 소품과 시의 분위기를 살린 출연자들의 의상이 시의 정감에 더욱 깊숙이 젖게 한다. 배경 영상은 모든 무대에서 그렇듯, 시의 배경을 실감 나게 재현해 주고 있다.

잠시 쉬어 가는 순서, 기타 연주자가 나와 연주와 함께 푸르른 날(서정주 시), 사람들(한돌 사)을 불러 무대의 전환을 알린다.

다음은 조지훈의 시로 구성한 오늘 무대의 하이라이트, 시 퍼포먼스 순서다. 날렵하면서도 우아한 아우라를 풍기는 의상의 두 여 회원이 달려 나와 춤사위를 펼치는 것으로 열린 무대는 남 회원의 몸짓과 함께 풀잎 단장낭송으로 이어진다. 다섯 출연자 모두 등장하여 낭송하는 절정으로 옮겨가며 유장하고도 격정적인 춤사위와 더불어 퍼포먼스도 절정에 이른다. 서서히 하강하여 아침에 이르고, 꽃 지는 춤사위와 함께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를 애틋한 목소리로 합쳐내면서 끝난다. 잔뜩 숨을 죽이고 있던 객석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진다. 울고 싶은 감동으로 끝을 맺은 찬란한 무대였다.

시 낭송 교육에 관심이 많은 임종식 교육감께서 특별 출연하여 내가 사랑하는 사람(정호승)을 온화한 목소리로 낭송한다. 교육감께서 각별히 사랑하는 사람은 이 땅의 모든 학생일 것이다. 콘서트가 끝나고 함께 출연한 꿈나무들을 정겹게 다독여 주기도 했다.

조금은 자란 꿈나무 순서다. 남녀 중학생 두 명이 등장하여 별 헤는 밤(윤동주)나룻배와 행인(한용운)을 제법 물이 오른 목소리로 낭송한다. 장차 무성한 숲의 우람한 나무가 될 재목들이다.

수필 낭독 순서로 이어진다. 출연자 수필가의 자작 수필 외로움과 고독(이일배)을 사회자와 함께 윤독해 나간다. “고독할 때 마시는 술은 달금할 수도 있지만, 외로울 때 드는 술잔은 쏟아버리고 싶을 수도 있다…….”며 차분한 목소리와 맑은 음성이 조화를 이루어 고독과 외로움의 다른 모습들을 애틋하게 그려나간다. 관객들은 한껏 숨을 죽인다.

마지막 무대 시극이다. 시극 연출 전문가 부회장의 연출과 출연으로 두 여회원과 함께 엮어나간다. 세상살이의 한 단면을 그린 가위바위보 세상(김윤현)으로 시작하여 가을(함민복), (정현종) 등 짧은 시 몇 편을 주고받으며 시의 흐름을 드라마틱하게 꾸민다. 나 하나 꽃피어(조동화)로 끝을 맺으며 시의 꽃을 한껏 피워내고는 관객들에게 인사를 할 때 장내는 환호의 도가니로 끓는다.

피날레 순서로 음악가 회원이 아름다운 세상(박학기)을 선창하자 아름다운 세상이 바로 여기라는 듯 관객들도 모두 따라 부른다. 출연 회원, 스태프진들이 모두 나와 아름다운 시 외며 사는 행복을 담은 협회가를 제창하며 관객을 향해 손을 흔들자 관객들도 일어서며 환호의 손길을 보낸다. 출연자와 관객들이 함께 기념촬영을 하는 것으로 모든 순서가 끝났다.

숲을 찾아와 그늘을 한껏 향유하던 당신들은 모두 돌아가고 숲만 남았다. 무성한 숲만 그대로 무대에 우거졌다. 숲은 영원히 무대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곧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지고 맨살의 성찰을 거쳐 다시 봄여름을 맞을 것이다. 더욱 싱그럽고 무성한 숲을 이룰 것이다.

당신은 그 숲을 다시 찾아올 것이다. 더욱 향기로운 숲의 그늘은 언제나 사랑하는 당신을 맞을 것이다.

오늘 우리 시의 숲에 온 당신, 그 숲 아늑한 향기 속에서 다시 해후할 수 있기를-!

                                                                 

 

살고 싶다

 

아내는 살고 싶어 했다. 잘 살고 싶었다. 마당 텃밭이 좁다며, 사는 집이 편하지 못하다며 마음에 안 차 했다. 왜 그리 욕심이 많은가. 상추만 길러 먹을 만한 밭이면 족하지 않은가. 집이 좀 좁고 누추하면 어떤가. 얼마나 오래 살 거라고 그리 힘을 들이려 할까. 아내의 욕심에 나는 가끔 딴죽을 피우기도 했다.

어디 남의 쉬고 있는 땅이라도 있으면 찾아가 그 땅을 쪼아 무어라도 심고 갈았다. 잘 가꾸든 못 가꾸든, 푸성귀가 자라든 풀이 무성하든 그저 심고 갈고 싶어 했다. 벽돌로만 얇게 쌓아 지은 집 말고, 콘크리트 옹벽에 철근을 넣어 집을 지어볼 수 없을까. 추위도 더위도 걱정 없는 집, 마당 넓은 집에서 살아볼 수 없을까. 그런 집을 짓고 싶어 했다.

드디어 아내의 꿈이 눈앞에 이르렀다. 대출도 좀 내고, 아이들 도움도 받아 가며 전답 하나를 손에 넣었다. 마침 동네를 흐르는 강에서 하상河床 준설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나온 모래며 자갈을 받고, 주문한 흙으로 땅을 돋우어 반쪽은 밭으로, 반쪽은 대지로 만들었다.

밭에는 깨며, 들깨, 콩 들을 심고, 대지에는 아내가 원하는 대로 두꺼운 옹벽 집을 짓기 시작했다. 밤낮이 바뀌기를 거듭하는 사이에 밭에는 작물들이 자라고, 대지에는 철근 옹벽이 서기 시작했다. 이삼 년이 경과하면서 밭은 무성해지고 집은 제 형체를 이루어 갔다.

그런 것들에 비해 아내의 몸은 자꾸 쇠약해져 갔다. 일에 힘이 들기도 했겠지만, 평소에 가끔씩 앓아누울 정도로 건강 상태가 그리 튼실하지 못했다. 거기다가 자기가 하는 일을 내가 잘 이해해 주지 못한다고, 내가 하는 일을 아내가 그리 반기지 않는다고 가끔씩 다투기도 한 것이 마음의 짐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아내는 점점 잦아드는 듯한 건강 때문에 오히려 괜찮은 경작지며 쓸모 있는 집을 가지려 했음이 분명하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지게 되면 건강도 좋아질 거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졌던 같다. 그래서 일에 더욱 열성을 부렸는지도 모른다. 아내는 잘 살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혼자서, 때로는 나와 같이 지역에서 무슨 진료를 잘한다는 병원 의원들을 들락거리기도 하고, 아이들이 사는 대도시의 큰 병원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한의든 양의든 가리지 않고 진료를 받고, 한약이든 양약이든 그 처방을 마다하지 않았다. 아내는 살고 싶었다.

그런데 병원의 의사며 기계들은 아내의 병통을 분명하게 짚어 내지 못했다. 내가 속을 너무 썩여 얻은 심통心痛 때문에 병명도 명확히 잡을 수 없는 환우에 빠진 건 아닐까. 마침내 아내는 아이들 집으로 거처를 옮겨 긴 와병에 들어가야 했다.

아내는 나와 함께 반세기 가까운 세월을 살아오는 사이에 갖은 고초를 참 많이 겪었다. 아이들 키우랴, 살림살이 건사하랴 하는 일들은 남들이 다 하는 일이라 치더라도 나와 아내의 잘 맞지 않는 상념들 때문에 다투기도 많이 했던 고통이 가장 컸을지도 모른다. 순전히 나 때문에 내가 그 병통을 앓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들 집에서 병원을 오가며 병과 싸우고 있던 아내는, 그러기를 달포가 되어 가던 어느 날부터 집의 무슨 열쇠며 통장은 어디에 있고, 무슨 문서는 어디에 갈무리해 두었다며 잘 찾아 챙기라는 말들을 자주 했다. 나는, 당신이 나아서 오면 될 일을 그런 걸 왜 나에게 말하느냐고 했다.

또 어느 날은 전화하여 자기가 어떻게 되면 아이들에게는 무엇을 어떻게 해주고, 무슨 일은 어떻게 처리하라는 말들을 했다. 문득 겁이 났다. 아내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걸까. 빨리 나아서 돌아와야지 무슨 말을 하느냐며 소리를 높였다.

당신이 돌아오기만 하면 내 이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이 되어 당신 말을 아주 존중하겠다며 어서 낫기만 하라 했다. 아내도 나아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몸이 자꾸 말을 안 들으니 어찌하면 좋으냐며 목메어 했다. 참 살고 싶다 했다.

나는 죽고 싶었다. 아내를 사경에 이르게 한 내가 어찌 살아 있으랴 싶기도 했지만, 아내 없이 사는 내 모습이 도무지 상상되지 않았다. 그건 다른 곳, 어디 먼 나라 사람 일일지는 몰라도 전혀 나의 일일 수는 없다. 하루를 먼저 가도 내가 먼저 가야지, 아내가 먼저 가다니, 그게 될 말인가. 아내가 세상을 바꾸기 전에 내가 꼭 먼저 가야 한다.

아이들의 손길을 부여잡고 누운 지 두 달이 되어 가던 어느 날, 아내는 아이들의 손길도 이 세상의 줄도 느닷없이 놓고 말았다. 내가 달려갔을 때 아내는 체온이 이미 다 빠져나간 뒤였다. 눈을 감은 아내의 손에 좋아하는 포도가 들려 있었다고 했다. 아내는 끝까지 명줄을 놓으려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죽어야 할 일이었다. 아내는 자기가 심은 들깨가 무럭무럭 자라 무성하게 우거져 있는 밭도 뒤로 하고, 도색만 하면 짓기도 끝나는 집에 한 번 누워 보지도 못하고 눈을 감았다. 아내가 그리 원하던 걸 내가 보고 있을 일이 아니었다. 아내 대신 내가 한 항아리의 재가 될 일었다. 무참히도 내가 살아남고 말았다.

아내의 살고 싶음은 무엇인가. ‘죽어 감이었다. 그렇기에 죽음을 물리치려고, 살아보려고 그토록 애를 썼던 게 아니었을까. 나의 죽고 싶음은 무엇인가. ‘살아 있음이다. 살아 있기에 죽고 싶은 게 아닌가. 살고 싶은 사람은 그리 애처롭게 죽어 가고, 죽고 싶은 사람은 이리 서럽게 살아남았다.

살고 싶음의 아내여! 그쪽 세상에서 그 삶 잘 이어가고 있는지? ‘죽고 싶음의 나는 왜 이리 아프게 살아 있는지? 살고 싶음의 죽어 감이여, 죽고 싶음의 살아 있음이여~!(2023.9.1.)

                                                                      

 

혼자 돌아왔다

 

돌아와 달라고 애절하게 빌었건만, 오히려 나를 불렀다. 달려갔던 나는 혼자 돌아오고야 말았다. 돌아와 주기만 하면 내가 아주 딴사람이 되어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나의 애끊는 호소는 허공중에 무참히 흩어져 버렸다.

바쁜 일이 있더라도 아이들 전화는 잘 받아 달라던 부탁이 나에게 한 마지막 말이 될 줄이야. 당장 당신에게 달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러지는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 말만 믿고 나는 내 볼일을 천연하게 보고 있었다.

당신의 부탁대로 아이들의 전화를 잘 받았지. 그런데 이게 무슨 산산조각 깨어져 내려앉는 하늘 같은 일이란 말인가. 내가 달려갔을 때 당신 체온은 이미 빠져나가 버리고, 감은 눈에 앞니 하얀 끝자락만 살포시 보여주고 있었지. 오랜만에 만나는 나에게 짓는 미소였던가.

아이들 곁으로 가서 아이들 손길을 부여잡으면서 세상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애쓴 지 두 달이 가까운 어느 날, 그렇게 세상의 끈도 아이들의 손길도 모두 놓아버렸네. 그동안 내가 한 일은 어서 돌아오라고, 잘 나아 돌아와 달라고 비는 일뿐이었던 것이 야속했을 것이네.

야속한 일이 어디 한두 가지일까. 돌아보면 평안을 주고 사랑을 안겼던 일은 별로 한 게 없이, 살이의 모든 짐을 지우고 속만 끓게 하였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원망스러웠을까. 병원의 기계들조차 집어내지 못하던 그 병통은 모두 내가 만든 것만 같으니 어찌하면 좋은가.

엄마, 엄마~!’ 피 끓는 목소리로 당신을 부르며 자지러질 듯 당신 품에 엎어져 통곡하는 남매 아이들의 울음소리도 모두 내 탓인 것만 같아 나는 차라리 눈물을 욱여넣어야만 했네. 우리 살아오는 동안 당신 향한 내 가슴과 손길이 조금만 더 따뜻했어도 아이들 이리 목놓아야 할까.

숱한 원망을 품고 갔을 당신, 나에게 남은 회한은 어찌하면 좋은가. 꽃 장식에 싸인 당신은 관으로 들고, 관 위에 장례지도사가 무어라 한 마디 적으라 하데. 가슴에 엉긴 말을 어찌 다 풀어 놓을까. ‘미안하오, 편히 가시오이렇게밖에 적을 수가 없었네.

그 시답잖은 한마디 말로 당신 가슴의 응어리가 어찌 다 풀어질 수 있을까. 그래도 관 속에 들 때 당신 얼굴은 주름살 하나 없이 입술연지를 빛내고 있었지. 속은 나에게 대한 원망으로 끓고 있었겠지만, 남은 붙이들을 위해 마지막 선물로 주고 간 것인가.

그렇게 염습, 발인제를 거쳐 한 항아리의 재가 되어 납골에 삼우제, 성분제라는 세상의 절차를 거쳐 당신은 떠나갔지. 그 몇 절차로 당신은 홀연 떠났지만, 아이들과 내가 헤쳐가야 할 숱한 이 세상의 절차는 또 어찌해야 하는가. 그 절차 어떻게 헤쳐가며 살아야 하지?

당신의 절차를 다 끝내고 조문객들의 위로와 당부를 잔뜩 안고 나는 돌아왔네, 혼자서 돌아왔네. 모든 것이 그대로인 집에 나 혼자 돌아왔네. 밤이 되어 잠을 자고 아침이 오고 일어났네. 그 아침도 어김없이 나에게 오데. 야속하게 오데.

연전에 친구 부인이 친구를 두고 급작스레 떠났을 때, ‘장자(莊子)는 노자(老子)가 죽어 문상 간 진일(秦佚)의 이야기를 앞세워, 죽음도 삶도 자연현상에 불과한 것이니 죽음 앞에서 울고불고할 것 없이 편안히 여겨 자연의 도리에 따르면, 기쁨이나 슬픔 같은 감정이 끼어들 수가 없다고 했다.’라는 말과 글로 친구를 위로해 준 적이 있다.

이 얼마나 허망한 말이었던가. 위로랍시고 하는 내 말을 친구가 어떻게 들었을까를 생각하니 얼굴에 화기가 솟는다. 친구여, 사과한다. 친구의 아내, 내 아내의 죽음이 무슨 자연현상이란 말인가. 불시에 간 친구 아내며, 병통 애통 속을 떠난 아내가 과연 자연현상인가.

그게 자연현상이라면 얼마나 원망스러운 자연이고, 얼마나 한탄스러운 현상인가. 진리며 명언이란 겪어보지 않고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 그런 한가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인가. 그저 머리로만 짜낸 허언으로 중생들을 현혹하는 것은 아닐까.

장자가 처의 주검을 앞에 두고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고? 그게 사람으로 할 짓인가. ‘하늘과 땅이란 거대한 방 속에서 편안히 잠들고 있는 것을 축복하는 것이라고? 그게 무슨 축복이고 달관이란 말인가. 허망하고도 서럽다.

지금쯤 아내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내가 있는 곳은 슬픔도 괴로움도 없는 곳이겠지. 애탐도 속 끓임도 없는 곳이겠지. 누가 있어야, 무엇을 볼 수 있어야 괴로워하든 속을 끓이든 할 게 아닌가. 그저 편안하게만 있을까. 아내는 그 편안한 세상을 찾아간 걸까.

그래서 성인은 당신 아내의 죽음을 두고, 세상 천지간에 편안히 잠들었다.’ 한 건가. 그걸 두고 자연의 도리요, 자연현상이라 한 건가. 그랬구나. 아내는 그 도리 속으로 갔구나. 아무도 없고, 무엇도 안 봐도 되어 속 끓일 일도 없는 편안한 곳으로 훌쩍 떠났구나.

그렇게 아내는 속 끓일 사람 없는 편안한 곳으로 떠났다. 서러운 이승의 집에 나 혼자, 혼자만 돌아왔다.(2023.8.20.)

                                                                      

 

가요무대』를 보며

 

가요무대는 많은 시청자로부터 사랑을 받아오고 있는 아주 오래된 정통 가요 프로그램이다. 무대를 통해 방송하는 가요들은 애틋한 추억에도 빠져들게 하고, 가슴 뭉클한 향수에도 젖게 하고, 사무치는 그리움에 에어지게도 하고, 또 어떨 때는 어깨 절로 들썩이게 하는 흥겨운 가락으로 시름을 씻어주기도 한다.

그런 가요를 들으며 사람들은 흘러간 날의 추억과 사람, 그 그리움에 젖어 보기도 하고, 마치 그리운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 듯한 환영에 싸여 보기도 한다. 학창시절로 돌아가 풋풋한 친구들과의 우정 놀이에 빠져 보기도 하고, 첫사랑의 그림자에 아늑히 안겨 보기도 한다. 손뼉으로 함께 흥을 맞추며 살이의 고달픔을 잊어 보기도 한다.

가요무대는 그런 노래만 고른다. 그렇게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면서 잊고 살던 아름다운 일들을 떠올리게도 하고, 우울에 잠겨 있던 마음을 은근하고도 흥겨운 가락으로 달래주기도 하고, 다가올 날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품게도 해준다. 그런 노래들을 모아 들려주려고 하는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가요무대가 오늘은 왜 이리 부담스럽기만 한가. 어떤 노래가 나와도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려 주는 것이 아니라 잘못 산 날들의 굴절된 기억을 긁어내는 것 같고, 위안을 주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산산조각으로 무너뜨리는 것 같고, 흥을 돋우어 주는 것이 아니라 어지러운 심정을 더 어지럽게 비트는 것 같기만 하다.

아무리 아름답고 흥겨운 가락도 저들만의 한바탕 걸판진 놀이일 뿐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고, 템포가 빠르거나 느리거나 가락이 애절하거나 흥에 겹거나 나는 그런 것에서 점점 소외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노래들을 내가 왜 듣고 있어야 하는가. 꺼버린다. 눈을 감는다. 더욱 깊숙이 따돌려지는 것 같다.

아내가 집을 떠난 지 달포가 넘은 어느 월요일 밤, 누워서 가요무대를 보다가 몇 곡 못 들어서 꺼버렸다. ‘전국 가요 기행을 한다고? 그래서 서울 대전 대구 부산을 찍고 임을 찾아간다고.? 서울 종로에다 사과나무를 심는다고? 거리마다 푸른 꿈이 넘친다고.? 아내는 지금 병상에 있는데, 무슨 꿈이 넘친다는 말인가!

장충단 공원 안개 속으로 누구를 찾아와? 신사동 그 사람이 어떻다고? 아이들의 손길을 힘들게 부여잡고 환우 속을 헤매고 있는 아내를 저들이 알까. 알면서 이런 노래들을 부를 수 있을까. 그렇구나. 세상은, 그 속의 인심은 나와는 아무 상관 없이 돌아가고 있구나. 이 노래들이 이렇게 사람을 고단하게 하는구나.

병원의 기계들은 아내의 환부를 딱 잘라 짚어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아내는 자꾸 여위어져 가고 있다. 몸도 마음도 움직임이 점점 어려워져 간단다. 모두 내 탓이다. 우리는 서로 보듬기 어려운 삶을 살아온 것 같다. 내가 가진 세계를 아내는 껴안기가 어려웠고, 아내의 심사를 받아들이는 일에 나는 적극적이지 못했다.

오늘도 아내는 남매 아이들의 손길 속에 누워 있다. 내가 아내에게 좀 더 따뜻하게 손과 가슴을 내밀었더라면, 아내가 아이들의 손길을 받고 있어야 할까. 나는 지금까지 아수라도의 세상을 살아온 것 같다. 아니, 내가 아내를 아수라도 속을 살게 한 것 같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 고통이 아내의 병통이 되게 한 것 같다.

이제부터는 오직 당신만을 바라보며, 당신의 마음 모두를 내 마음으로 만들며 살겠노라는 내 간곡한 말은 지옥도, 축생도에서 지르는 내 애절한 비명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이기적인 집착과 무정이 아수라의 세계, 지옥의 세계를 만들고, 내가 만든 그 세계에 아내도 빠져 아귀도 같은 삶을 살아온 건 아닐지 모르겠다.

가요무대가 무슨 죄랴. 내가 만든 세계가 마음을 아수라로, 지옥으로 빠뜨리니, 그 아름다운 노래들조차 비명처럼, 비소처럼 들렸을 뿐인 것을-. 나는 지금 이승에서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나는 삼악도三惡道 속을 헤매고 있는가. 그 속을 어찌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아내여, 마음 편해 해주오. 때늦긴 하오만은 내 모든 집착과 이기를 버리고 청정해지려 하오. 청정해질 것이요. 돌아오시오. 와서 보아야 청정해지려 애쓰는, 청정해진 내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 아니오? 지금 나는 당신이 비워 놓은 자리를 닦고 있소. 있는 힘을 다해 정결히 닦고 있소. 내 마음도 함께 자성을 다해 닦고 있소. 부디 속히 돌아오시오.

돌아와 즐거운 가요무대함께 들읍시다. 같이 손뼉도 쳐봅시다. (2023.8.6)

                                                                

 

나를 버린 자리로

 

고적한 한촌 생활 속에서 일주일에 한 번 금요일 나들이는 적막을 활기롭게 넘어설 수 있는 아늑한 기쁨이요, 힘줄 돋는 활력소가 되고 있다.

나의 금요일은 만남의 날이다. 오전에 집을 나서 버스를 타고 구미로 가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도서관 수필반 회원들을 만난다. 희로애락의 사연들을 담은 수필을 함께 읽으며 문학과 삶을 이야기하며 한껏 희열에 젖는다.

그 시간이 끝나면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대구로 간다. 친구들과 정겨운 술잔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아니면 수시 연락을 통해 만나는 친구들은 먼 곳에 사는 나를 배려하여 그 만남의 약속을 나에게 맞추어 준다.

오늘도 공부를 끝내고 터미널로 나와 대구행 버스를 기다린다. 버스를 타는 재미도 쏠쏠하다. 일단 차를 타면 그 차 속은 잠을 자든 책을 읽든 사색에 들든 나의 무한 자유 공간이다. 음주 운전의 위험도 전혀 없다. 얼마나 편하고도 편리한 행보인가.

내가 기다리는 차는 청주에서부터 출발하여 온다는 5시 차다. 구미에서 시발하는 520분 차도 있지만, 잠시라도 빨리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 늘 5시 표를 산다. 이 무슨 변고인가. 5시면 구미에서 출발해야 할 차가 도중에 사고가 있어서 30분 정도 연착한단다.

속이 상했다. 차라리 520분 표를 사기보다 못하지 않은가. 먼 데서 오는 차라 몇 분쯤 연착할 때는 있었지만, 무려 반 시간이나 연착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다. 다가오는 약속 시각이 초조를 회오리치게 한다. 차가 도착하면 기사에게 따져 보기라도 해야 할까.

드디어 차가 도착했다. 내가 타면 앞서 탄 승객이 기사에게 따지고 있을 것이다. 차를 탔다. 잠잠했다. 무어라 하는 사람이 이상하게도 아무도 없다. 정시에 타고 예사롭게 가는 승객들처럼 모두가 묵묵했다. 속을 상해했던 내가 오히려 이상한 건가.

그랬구나, 모두 기사의 사정을 이해들 하고 있구나. 기사인들 연착하고 싶어 했을까. 불가항력적이다 보니 그리되었을 것이다. 아니, 기다리는 승객을 생각하면 기사도 마음이 편안했을까. 그 마음조차 사람들이 잘 헤아리고 있는 모양이다.

요즘 세계 일도, 나랏일도, 사회 일도 참 시끄럽다. 서로의 사정은 내쳐버린 채 전쟁을 일으키고, 정쟁을 일삼고, 살벌하게 다투고 있다. 이 모든 일이 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모두 내가 탄 버스 승객들의 마음 같다면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

지금 아내는 병고 속을 힘겹게 헤매고 있다. 반세기 가까운 생애를 함께 살아오는 사이에 아내 속을 참 많이 썩였다. 지금 아내의 병이 모두 나 때문에 생긴 것 같다. 아내의 마음을 잘 안아주고 보듬어 주었더라면, 아내가 이런 고통을 겪을까.

아내와 나는 상념의 세계가 너무 다른 것 같았다. 이상이 맞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서로 그려지는 세계가 다르기에 십상이었고, 다정하게 대화하기보다는 다투기가 쉬웠다. 그게 오랜 세월 쌓여 오는 사이에 화가 되고 병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차를 타고 가며 아내를 생각한다. 왜 한발 물러서지를 못했던가. 왜 먼저 포용의 가슴을 내밀지 않았던가. 왜 욕심을 줄이지 못했던가. 물러선 발길 속에, 내민 가슴 속에, 줄인 욕심 속에 왜 아내를 담지 못했던가.

내가 모르고 살던 것을, 아니 알려 애써보기도 별로 하지 않았던 것을 이 차 안에서 새삼스럽게 발견한다. 그리 연착된 차 시각도 이해하면 아무렇지도 않게 되는 것을, 마음을 열어버리면 속에 다 들어오게 되는 것을.

기사에게도 제힘으로써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듯, 아내에게도 자기만의 세계가 있고, 어찌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 아내를 이 승객들 마음으로 대했다면, 그렇게 안아주었다면 아내 가슴 속에 그리 화가 맺혔을까. 그리 병이 되었을까.

아내여, 어서 일상으로 돌아오오. 이제 모든 것을 품으리다. 당신의 모든 것을 받아 안으리다. 그동안은 내가 너무 편협하고 옹졸했소, 이 때늦은 뉘우침이 당신을 돌아오게 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되겠소만, 이 정은 내치지 말아주오.

자기를 버리기에 자기가 있게 되니, 사사로움이 없기에 나를 능히 이룰 수 있지 않으랴. 外其身而身存 非以其無私邪 故能成其私(老子 道德經7)라는 말은 읽으면서도 얄팍한 가슴으로만 읽었던 이 올곧잖은 일을 너그러이 품어주기를 간곡히 바라오.

차는 지급 계속 달리고 있소, 자기 속을 버린 그 묵묵한 승객들과 함께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소, 좀 있으면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요, 어쩌면 나를 비운 사람이 되어 내릴 나의 목적지일지도 모르겠소. 나를 버린 곳에 앉힐 당신이 자리-.

그곳으로 당신 어서 오오. 간절히 기다리겠소-.(2023.7.23.)

                                                                      

 

소원이 있다면

 

오늘도 산을 오른다. 푸르고 싱그러운 나무를 본다. 살 만큼 살다가 강대나무가 되고 고사목이 되어 쓰러져 누운 것도 보이지만, 산은 푸르고 울창하다. 하늘 향해 한껏 잎을 떨치고 있는 이 나무들이 있기 때문이다.

저 나무들의 소원은 무엇일까. 오직 하늘을 향하는 일이다. 하늘이 내려주는 빛을 타고 하늘에게 좀 더 가까이 오르는 것이 나무들의 가장 큰 소원일 것이다. 그 소원을 부여안고 열정을 태우다가 그 원이 다했다 싶을 때 서서히 내려앉는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나에게도 소원이 있는가. 어떤 소원이 얼마나 있는가. 한때는 바라는 것이 크고도 많았고, 해내고 이루고 싶은 것도 적지 않았다.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기도 하고, 바라기만 하다가 말고 하는 사이에 세월이 흘러갔다.

황혼을 껴안고 있는 세월 앞에까지 왔다. 이 세월이라고 바라고 이루고 싶은 것이 어찌 없으랴만, 예전 같지 않다. 소원으로 담을 것들이 그리 많지 않다. 이루고 싶은 것이 쌓이는 세월에 반비례라도 하듯 점차 줄어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무가 하늘을 향하는 소원이 다 했다 싶을 때는 내려앉는 것처럼 나도 세상에서 내려서야 할 때가 다 되어간단 말인가. 누구는 이런 상념에 젖는 나를 보고, 얼마나 살았다고 그러느냐 할지 모를 일이지만, 사람마다 타고난 명줄의 행보야 누가 아는가.

나무는 제 하늘을 누릴 만큼 누렸다 싶거나, 제가 누릴 수 있는 하늘이 별로 없다 싶을 때 서서히 숨을 거두어 간다. 그건 체념이나 절망 같은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것일 뿐이다. 숨 달린 모든 것은 무릇 그 뜻과 이치를 어찌 벗어날 수 있으랴.

지금 나에게 절박한 소원이 하나 있다. 병약한 아내가 건강을 회복하여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오는 일이다. 또 하나 품고 싶은 소원이 있다면, 그건 바로 멀지 않은 날에 자연사를 성취하는 일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소원일지 모른다.

내 힘으로 이루기 어렵거나 이룰 수 없는 소원을 감히 품고 있다. 아내의 건강에 대한 소원도 그렇지만, ‘자연사라는 게 자연이 할 일이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던가. ‘멀지 않은 날을 바라는 것도 오로지 나의 원일 뿐이다. 내가 정할 수 있는 날도 아니지 않은가.

좋은 날 편안한 때에 깊이 든 밤잠을 이어가듯 그렇게 가면 좋겠다. 장관까지 지낸 어느 명사도, 한 생애를 찬란히 풍미하던 인기를 누리며 만인의 심금을 울렸던 어느 예인도 그렇게 가지 않았던가. 그들처럼 살지도 못한 주제에 그런 종언을 바란다는 게 민망은 하지만.

왜 그 멀지 않은 날을 바라는가. 타고난 내 생애에서 내가 걸머져야 할 일은 거의 다 한 것 같다. 내 힘이 미칠 수 없는 일은 비워내야 한다. 욕심을 내봤자 더 나은 일을 할 수도 없다. 지금부터의 삶은 덤에 지나지 않은 것 같다. 덤이란 지나쳐서는 안 된다.

멀지 않은 날의 내포에는 이런 상념도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아내보다 먼저 가고 싶다는 것이다. 옹졸한 이기심일지 모르지만, 이 배고 한이 서려 있을 유흔을 내가 정리하고 있는 모습이란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일이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갊을 수 있으랴.

또 하나 소이연이 있다면 아내를 너무 힘들게 했다는 것이다. 아내는 지금 나와 함께한 생애로 인해 병구를 이끌어 가고 있다. 때늦은 내 뉘우침으로 치유될 수 있을까. 그러기를 바라며 심정을 다 모으고 있지만, 짐을 덜어주는 것도 치유의 한 방편이 되지는 않을지.

부질없다. 하나도 내 힘과 뜻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일을 이리 소망하고 있다니-. 내 심정이 아내를 치유케 해줄 수 있을 것이며, 누가 멀지 않은 그 날을 나에게 가져다줄 것이며, 영원히 깨지 않을 그 편안한 잠을 이루게 해줄 수 있단 말인가. 허공을 젓고 있다.

나무는 하늘 바라기로 살고, 사람은 소원, 소망으로 살지 않는가. 마지막일 듯한 이 소원을 위해 간절히 기구를 모으며 살아 보련다. 간절하다 보면 이루어질 수도 있지 않으랴. 이 소원마저 내가 버리거나, 소원이 나를 버린다면 내 숨줄을 내가 다스리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내 속에는 그럴 힘과 용기가 있는 것 같지도 않다. 다른 무엇이, 누가 내 소원을 이루어 주기를 바라며 산다는 것이 채신없고 체면 모르는 일일지 모르지만, 이 소원 아니면 무엇을 잡고 살아야 하랴. 그래도 아내의 건강 회복을 다시 빌어 본다. 무엇을 더해야 할까.

고즈넉이 누워있는 마른 나무와 더불어 소망을 보듬으며 산을 내린다.(2023.7.14.)

                                                                    

 

공수거를 바라며

 

오늘도 산을 오른다. 숲이 한창 우거지고 있다. 엊그제만 해도 가냘픈 가지에 연록 잎을 내밀고 있던 것이 오늘은 튼실해진 가지에 우거진 녹음이 되어 오르는 길을 문득 막아서기도 한다. 나무가 이렇게 우거지다가는 산이 어떻게 될까.

산이 온통 풀과 나무 천지가 되어 내가 발을 들여놓을 틈도 없을 뿐만 아니라, 나무 아니면 아무것도 들 수 없고 마침내는 나무들도 설 자리, 살 자리가 없어 결국이 숲이 망하고, 산이 황폐해지지 않을까.

물론 기우다. 나무는 작은 씨앗으로 땅에 떨어져서 움이 나고 자라 잎을 돋우고 꽃을 피우면서 살아간다. 나무는 안다. 철을 맞이할 때마다 무엇을 달리해야 하고 얼마를 자라야 하는지를 안다. 그렇게 철을 거듭하려면 무엇을 가꾸어야 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도 안다.

그리하면서도 무한정 살려 하지는 않는다. 살 만큼 살았다 싶으면 선 자리에서 그대로 숨줄을 놓는다. 하얗게 강대나무가 되어 가다가 불어오는 바람결을 지고 그 자리에 눕는다. 비바람 세월에 몸을 녹여 제 태어난 흙으로 든다.

그냥 흙으로 드는 게 아니다. 살아서도 갖은 생명체들의 쉴 곳이 되어주던 나무는 숨줄을 저세상에 준 뒤에도 뭇 짐승이며 미물, 팡이실에까지 아늑한 보금자리가 되어 마지막 한 세포까지 다 빼주고는 소리 없이 흙이 된다. 말 그대로 공수래공수거다.

젊을 때 원양어선을 타면서 번 돈으로 건설회사를 세우고, 평생을 두고 열심히 일하여 부를 일군 어느 사업가가 만년에 이르러 가진 재산 대부분을 모교에 기부했다고 한다. ‘수의에는 호주머니가 없다.’라며 그리했다 한다.

기부를 받은 사람들에 의하면, 점퍼 차림으로 산책하듯이 찾아와서 선뜻 거액의 수표를 건네는 모습이 기부가 취미인 것처럼 편안해 보이더라 했다. 재산만 내놓은 게 아니라 살면서 가져온 갖은 사심까지도 다 내놓은 모양이다. 공수래공수거를 몸으로 보여준 것 같다.

공수래공수거 空手來空手去라는 말을 다시 돌아본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그 빈손이란 무엇이 비어 있다는 말인가. 그 말의 함의含意는 지극히 물질적인 것에만 매몰되어 있는 것 같다. 태어날 때도 아무 재물, 재화를 가져오지 않았고, 죽을 때도 그런 걸 못 가지고 간다는 말이 아닌가.

우리는 아무것도 안 가지고 태어나는가. 아니다. 몸과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는가. 처음에는 매우 여린 몸, 아주 작은 마음을 가지고 세상에 나왔지만. 살아가면서 몸은 커지고 마음에도 많은 것들이 들어찬다.

그 몸으로 세상을 살기 위한 온갖 일들을 감당해내고, 그 마음에 세상살이의 희비 고락이며, 갖은 허실의 욕망과 애증의 번뇌를 다 담는다. 그러는 사이에 몸에는 온갖 풍파와 싸워 온 병마들이 채워지고, 마음은 삶의 고뇌에 치이면서 다단하고 번다해져 간다.

가야 할 순간이 다가온다. 그 몸과 마음을 다 두고 진실로 빈손으로 갈 수 있을 것인가. 그걸 다 두고 가는 이야말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조용히 눈을 감는 득도한 고승과 같을지도 모른다. 모든 이가 다 그런 고승이 될 수 있을까.

많은 이들은 생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이며, 아름답고 애틋한 정과 그 기억을 내려놓지 못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속진의 삶에서 얻는 울분과 분노를 마지막 순간까지도 삭히지 못해, 그걸 안고 가느라 눈도 옳게 감을 수가 없는 이도 있을 것이고, 심지어는 이를 갈면서 억지로 눈을 감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조금 가져와서는 많이도 가져가는 셈이다.

이렇게 많은 것을 안고 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많은 것 내려놓고 아주 가볍게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며 대부분 재산을 좋은 일에 기부한 사람이 바로 그런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는 욕심도 번뇌도 가져갈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무를 다시 본다. 애초에 아주 작은 씨앗을 얻어 태어나 천지자연의 힘을 입어 조금씩 자라나고 커진다. 자연으로 나고 커지니 욕심이 있을 수가 없다. 커지면서도 잎이며 가지를 떨어뜨려 제 바탕으로 돌린다. 명이 다했다 싶으면 소용이 될 수 있는 곳에 모든 것을 다 주어버린다. 그래서 숲은 언제나 푸를 수 있지 않은가.

나는 무엇을 가져가게 될까. 내려놓지 못한 것이 많아 두렵다. 안고 가야 할 병마도 두렵지만, 자랑거리나 잘한 일은 별로 없이 살아오면서 저지른 허물과 잘못만 잔뜩 안고 가야할 것 같아 두렵다. 호오며 애증이든 공과든 모든 걸 씻고 빈손으로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편안히 누워 있는 마른나무를 보며 산을 내린다. 저에게도 울울창창한 시절이며 비바람 고행 세월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모든 걸 다 떨치고 저리 누워서 줄 것 다 주고 내려놓을 것 다 내려놓고 흙으로 공수거할 것이다.

죽어 다시 태어난다면 나무로 나고 싶다. 저 공수거를 바라며.(2023.6.18.)

                                                                      

 

나이 드니 참 좋다

 

오늘도 산을 오른다. 나날이 오르는 산이지만 빛깔이며 모습은 한결같은 날이 없다. 무엇이 달라도 다르다. 푸나무의 크기라든지, 나뭇잎 빛깔이라든지, 꽃이 피고 지는 거라든지, 열매가 맺고 떨어지는 거라든지 하루도 그 모양 그대로 있지 않다.

시간의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이 나무, 이 산빛에서 시간을 본다. 흘러가고 있는 시간의 얼굴이며 몸체를 본다. 맨살의 가지에서 꽃이 피고 잎이 나고 꽃이 지고 잎이 자라고 잎의 빛깔이 달라지다 내려앉고, 열매가 맺었다가 떨어지는 모습들 속을 시간이 흐르고 있다.

저들이 저리 변해 가는데, 나는 가만히 있는가. 아니다. 저들이 시간을 안고 변모를 거듭해 가듯 나도 나날이 달라져 간다. 나무가 나이테를 더해가는 것처럼, 나도 하루 이틀 시간을 더해가고 한 해 두 해 나이를 더해가고 있다.

저 잎이며 꽃들에게 흐르는 시간은 어떤 것일까. 나에게 하루하루 더해지는 시간들은 참으로 아늑하다. 그 덕분에 노도의 시간들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고, 격정으로 끓게 했던 삶의 함정에서도 헤쳐나올 수 있지 않았는가.

그때는 그리해야 하는 줄 알았다. 분노해야 하고 투쟁해야 하는 줄 알았다. 세월이 흘러가자 봄날의 눈발처럼 나도 모르게 잦아드는 것들이었다. 그 잦아든 자리에 고이는 것은 평온이 아니었던가. 돌이켜보면 모두가 시행착오요, 욕심의 덩어리들이었던 것을.

그런 것들이야 혈기 방장할 때의 일이라고 하더라도, 시간의 흐름을 따라 내 어깨에 등에 걸고 짊고 있던 짐들도 하나둘씩 내려져 갔다. 무엇이 그렇게 한 것인가. 나를 그렇게 평온으로 주저앉히고 있는 힘이 나이라는 시간의 선물이 아니고 무엇인가.

지금 나는 생애 최대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앞으로 나에게 어떤 자유가 더 주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내 자유는 지금 삶에도 죽음에도 별로 구애받고 싶지 않은 데까지 와 있다. 아무리 백세시대라지만 망팔쇠년도 한참을 지난 시간 속을 살고 있음에야 적잖이 살지 않았는가.

유엔이 정한 연령 기준*에 의하면 아직 나는 중년(middle-aged)이라 할 수 있지만, 노년(senior)이 그리 멀지만도 않다. 이쯤이면 삶에 그리 욕심내지 않아도 될 것 같지 않은가. 설령 지금 좀 욕심이 남아 있다 할지라도 나달이 가는 사이에 사그라들 욕심 아닌가.

당해 봐야 알 일이라 하더라도, 나에게 난치병 불치병이라도 와서 말기적 증세가 나를 거두려 한다면, 곱게 내 숨줄을 내어주고 싶다. 그래서 수년 전에 사전연명의료의향서라는 것도 국립 기관에 등록해 놓고 있는 터다.

다만, 나를 돌보는 이에게 빌고 싶은 게 있다면 진통제는 좀 고급으로 써 달라는 거다. 어느 명사, 어떤 예인의 마지막처럼 할 일, 즐길 일 다 치른 이튿날 아침, 밤잠 이어가듯 곱게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게 아니면 의약의 힘을 빌려서라도 편안히 가고 싶은 게 내 마지막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내가 마치 탈속이라 한 듯 모든 욕심을 다 내려놓은 것은 아니다. 여윳돈이 있으면 적금이라도 조금 들고 싶다. 세상의 명암을 달리하는 그 순간까지 주머니가 비어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계 관리나 부의 축적을 위해서가 아니다.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다. 하릴없이 폐를 남기게 될지라도 그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다. 내 생애 마지막에 이르러 나를 거두어야 할 이는 물론 나의 붙이들이겠지만, 살아오면서 잘해준 것도 없는 그들에게 내 행보의 짐을 어찌 고스란히 지울 것인가.

또 하나 버리지 못할 욕심이 있다면, 반평생 남아 글을 써왔다 하면서도 이렇다 할 글 한 편 제대로 못 남겨 온 것 같다. 숨줄을 저세상에 얹을 때까지라도 마음에 드는 글 하나 쓰고 가고 싶다. 세상에 남겨지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내 희열을 얻고 싶어서일 뿐이다.

이렇듯 정리하지 못한 욕심도 있지만, 다른 일에는 별로 큰 미련이나 집착이 없다. 나는 지금 어깨도 가슴도 참 가볍다. 이 가벼움은 무엇이 가져다준 것인가. 그게 바로 나이가 아니던가. 박경리 소설가가 운명하기 몇 달 전에 ……늙어서 이렇게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라 했다는 말이 공연히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겠다.

나에게 주어진 세상이 다하는 날까지는 나는 계속 나이가 들어갈 것이다. 점점 홀가분해질 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렇게 홀가분해지다 보면 어느 날엔가 날개가 솟아 푸른 하늘 속으로 훨훨 날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새 노래하는 푸른 시간의 얼굴을 보며 가벼운 걸음으로 산을 내린다.

나이 들어가는 것이 참 좋다.(2023.6.4.)

 

*UN이 정한 평생 연령 기준

1) 미성년자(underage) : 0~ 17, 2) 청년(youth) : 18~ 65, 3) 중년(middle-aged) : 66~ 79, 4) 노년(senior) : 80~ 99, 5) 장수 노인(longlived elderly) : 100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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