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병원 길

 

세 곳째 병원을 다니고 있다. 병원이든 의원이든 날 치료하는 곳은 나에겐 다 병원이다. 견디기 쉽지 않은 요통을 얻게 되었다. 시시로 통증이 올 때는 참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의욕마저 사라지는 것 같다. 허리가 편치 않으니, 앉고 서고 걷는 일이며, 무얼 들고 내리는 일이며, 몸 굽혀 땅이라도 파고 묻고 해야 할 일 같은 것들을 제대로 해낼 수가 없다.

노화 현상 중의 하나라 하지만, 어쩌랴. 사는 날까지는 불편을 없이 하거나 줄여서 살기라도 해야 할 게 아닌가. 척추센터가 따로 있는 큰 병원이며, 재활 치료를 잘한다는 정형외과에 해를 넘겨 가며 다녔지만, 별 효험을 보지 못했다. 통증을 겪고 있던 어느 날, 차를 타고 가는데 문득 어느 빌딩에 붙은 통증 치료라는 광고 막이 눈에 들어왔다. 한의원이었다.

집에 와서 전화하여 허리 통증도 치료할 수 있느냐고 하니, 내원해서 원장님과 자세한 상담을 해 보시라 했다. 간호사의 말이었지만,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담고 있는 말로 들렸다. 실낱같은 기대이라도 걸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다. 이튿날 그 병원으로 달려갔다. 약 향이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원장실로 안내받았다. 진료 이력이 그리 깊어 보이지 않는 의사였다. 우선 손목을 잡고 맥을 짚어보았다. 증상을 묻기에 지금도 저린 허리 부위를 먼저 짚어 보였다.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 식습관이며 소화 정도는 어떠냐, 운동은 어떻게 하고 있느냐는 등에 대해 꼼꼼히 물었다. 내가 겪고 있고, 하고 있는 대로 소상하게 말했다. 의사는 내 말을 들으면서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바쁘게 메모해 나갔다.

못 되어도 수십 분은 되었을 것 같다. 다른 곳의 경험에 비추어 의사가 환자와 상담을 위해 쓰던 시간과 친절 정도를 떠올리면, 그것만으로도 큰 치료를 받은 것 같았다. 한마디 한마디 말에 속에서 우러나오는 친절이 배어 있는 것 같아 큰 위안이 되는 것 같았다. 경과가 쉽지 않을 수 있지만, 약을 드시면서 일주일에 두 번쯤 치료를 받아 보시라 했다. 원장님의 친절한 말씀에 희망이 드는 것 같다 하고 치료대에 누웠다.

허리와 배를 따뜻하게 덮인 후에 누운 채로 발이며 다리, 복부, 머리를 주물러 맥을 짚고 침을 놓았다. 얼마간 지난 뒤 침을 다 뽑고 엎드리라 했다. 허리에 전기 치료를 하고 나서 통증 부위는 물론 허리 여러 곳 맥을 짚으며 침을 놓고 등에는 부항을 떴다. 그 손길 하나하나에 오롯한 정성이 고여 있는 것 같았다. 그 손길에서 맑은 감동이 느껴져 왔다. 치료를 마치고 나오는데, 몸이 한결 가벼워진 듯했다. 다음 치료 때에 달인 약을 주겠다 했다.

며칠 뒤에 가니 처음과 같은 치료를 하며 약침을 놓는다고 했다. 증세를 물으며 치료와 관련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자상하게 들려주었다. 치료를 마치고 나올 때 묵직한 약상자를 들려주는데, 그 안에는 마치 친한 이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자상한 복약 안내문이 들어 있었다. 책상에 의지하고 있는 시간이 많다 했더니 ‘30분 독서 후 5~10분 정도 가벼운 걷기 및 스트레칭을 하라.’ 하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의사는 불교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 독실한 불자였다. 깊은 불심이 환자에게 성심을 다하는 의사가 되게 한 것도 같았다.

이후로도 치료가 계속되었지만, 그 정성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의술을 기술로만 알고 치료 기능인 역할로 만족하려는 의사가 없지 않고 보면, 의술이란 곧 인술임을 믿고 환자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인 듯 치료에 심혈을 기울이는 의사가 돋보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세상에는 이렇듯 진정한 의사가 적지 않다.

외과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장기려(張起呂 1911~1995) 박사 같은 분은 자신은 이렇다 할 재산 하나 건사하는 게 없이 평생을 소외된 이웃에게 희생과 봉사의 의술을 베풀어 모든 이에게 감동을 주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몸이 불편하고도 외로운 어르신들을 부모처럼 여기며 치료와 위로를 위해 온갖 친절을 다 베풀어 주위 사람들로부터 자자한 칭송을 받고 있다는 어느 시골 공중보건의 이야기도 오롯한 감동을 준다. 지금 나를 치료하고 있는 의사도 이런 미담의 주인공이 되어도 모자람이 없을 것 같다.

신체에 고통을 받고 있으면 심신이 모두 약해진다. 이 약자에 대한 성심 어린 치료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따뜻하게 다스려 주는 일이 될 것이다. 나는 지금 따뜻한 손길이 그리운 약자가 되어 아픈 몸을 다스리고 다스림을 받기 위해, 마음에 위안을 받고 그 온기를 얻기 위해 오늘도 병원을 찾아간다.

몇 번의 치료로 잘 낫지 않을 수도 있고, 오랜 시간을 두고 치료를 받아야 할 수도 있겠지만, 따뜻한 손길이 있는 한, 나에게는 그립고도 즐거운 병원 길이 될 것이다. 병원 길이 즐겁다 보면 언젠가는 몸도 마음도 잘 다스려지지 않으랴. 기도 같은 걸음으로 즐겁게 병원 길을 나선다. (2025.4.13.)

                                                                      

 

먼 진달래

 

꽃 피고 잎 돋는 봄은 왔다. 그렇지만 내 몸은 아직도 봄을 저만치 밀쳐 내두고 있다. 한 해여 전부터 높은 곳, 비탈진 곳은 걷지 말라는 의사의 지시를 받은 터였다. 해거름이면 늘 오르던 산을 못 오르게 된 게 아쉽긴 했지만, 다시 힘찬 걸음으로 오를 날을 위하여 의사의 말을 따라 편한 길로만 걷고 있다.

잠시 혼절하여 쓰러지면서 벽에 부딪혀 척추에 골절이 난 것은 의사의 시술로 치료가 되었지만, 그 후로도 허리는 계속 저리고 아팠다. 시술의 후유증으로 알고 약을 먹으면서 낫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다시 검사를 해보니 그사이에 척주관 협착증이 왔단다.

사는 일, 행하는 일에 몸과 마음을 넓게 가지지 못해 허리도 협착해진 건가. 무릎도 말을 잘 안 들을 때가 있다. 다 노화 탓이라 한다. 늙는 일이야 어찌할 수 없지만, 사는 날까지 하고 싶은 일, 보고 싶은 것은 챙기며 살고 싶다. 그리되기 바라며 먹어야 할 약 알뜰히 먹고, 받아야 할 치료 착하게 받고, 필요한 운동을 위해서도 애쓰고 있다.

기력이 닿을 때까지 하고 싶은 일 하나 있다면, 수필교실 가족들과 오래도록 만나는 일이다. 한 주일에 한 번씩 수필 속의 삶을 함께 나누고, 삶 속의 수필을 같이 찾아가는 사람들과 만나는 날, 그날이야말로 나의 봄이고, 그 사람들이야말로 나의 꽃이다. 그 봄과 꽃을 오래오래 보듬으며 살고 싶다.

봄이 되면, 꼭 보고 싶은 게 있다. 해마다 이맘때면 반갑게 만나는 봄꽃이다. 강둑에 줄지어 선 벚나무가 피워내는 꽃이 해사하고 화사하게 어우러지면 내 봄은 절정에 이른다. 그보다 앞서 산에서는 올괴불나무꽃, 생강나무꽃에 이어 진달래꽃이 봄을 이고 달려온다. 세상을 다하는 날까지 그 사람들, 그 꽃들과 만나는 일 말고 무엇이 더 그리울까.

언젠가는 성한 몸이 돌아오리라 믿고 있지만, 믿음처럼 쉽게 나아지지는 않는다. 내 처지와는 아랑곳없이 봄은 아장아장 오고 있다. 늘 걷는 강둑 길섶에 푸른 움이 한두 곳 여리게 보이는가 싶더니, 겨우내 무거운 침묵에 잠겨 있던 벚나무가 망울에 은은한 혈기를 얼비추어 내고 있다.

이쯤이면 산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무엇이라도 꿈틀거리고 있을 거다. 스틱을 짚고 나선다. 오르기 쉽지 않겠지만,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스틱으로 받치며 힘주어 오르는 발길을 낙엽이 밀어제치기도 하지만, 이 기슭을 오르면 무언가라도 봄소식을 들을 수 있겠지. 의사의 말을 잠시 잊기도 하고, 잊어버리고 싶기도 하다.

드디어 기슭을 올랐다. 푸른 솔숲 길을 지난다. 봄이 보인다. 노란 얼굴 앙증히 내밀고 있다. 생강나무꽃 어린 망울이다. 그러면 그렇지, 강둑에 오는 봄을 산인들 어찌 모른 체하랴. 함께 보고 싶은 게 또 하나 있다. 올괴불나무꽃이다. 붉은 꽃술과 연분홍 꽃잎이 돋보이는 손톱만 한 꽃-.

보이지 않는 꽃을 찾노라니 잊고 있었던 허리가 저려 온다. 저기 보일 듯 말 듯 두어 개 망울이 보이지만, 아직은 좀 이르구나. 잘 피어나거라. 내 다른 세상의 꽃 좀 만나고 올 터이니 포근한 봄 안고 와 있거라, 당부하고 내려온다.

한 시간여를 달려 차를 내린다. 고마운 마중과 함께 교실에 이른다. 책상을 서로 마주보기 좋게 가지런히 놓고 있으면. 꽃들이 달려온다. 봄을 안고 온다. 봄을 맞아 새로이 문을 연 수필교실이다. 때로는 눈물로 때로는 터지는 홍소로 수필 속에 깃든 삶을 함께 나눈다. 삶 속에서 수필을 찾아내기 위해 궁구의 심연을 헤매기도 한다. 통증이 간데없다. 봄이 익어 간다.

이제는 산에도 녹은 봄소식이 와 있을까. 스틱으로 허리를 받치며 산을 오른다. 그리던 대로다. 진노랑 생강나무꽃이 이제야 제 세상인 듯 복슬복슬 무르녹았다. 저기 가녀린 가지 끝에 오종종히 달린 연분홍 아기 초롱, 올괴불나무꽃이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인 채 함초롬히 미소 짓는다. 그래, 그런 네 모습을 그려 내 이리 와 있지 않으냐.

이때쯤이면 또 하나 반가운 것이 얼굴을 내밀 듯도 한데 싶어 두리번거리며 오르막 하나 더 오른다. 허리도 저리고 다리도 무겁지만, 발이 자꾸 앞선다. 발이 아는구나. 저만치 보이는 다홍빛 꽃잎, 진달래다. 언제 저리 잎까지 벌렸나. 마른 풀숲 헤치고 다가간다. 쓰다듬고 만져 보기도 하면서, 급기야 꽃잎 하나 살포시 따서 입에 살짝 넣어 본다. 향긋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저 먼 가풀막 한 자락에 쏟아부은 듯 분홍 잎새들, 무리 진달래가 미소를 피우고 있다. 달려가 그 미소 속에 묻히고 싶다. 그리운 사람, 치맛자락 같을까. 또 발이 앞선다. 어쩌랴, 발은 자꾸 앞을 지르지만, 몸이 말을 안 듣는다. 저 가풀막은 도저히 안 되겠단다. 저 먼 진달래를 향해 손을 흔든다. 안긴 거로 할게. 아주 아늑했던 거로 새겨둘게-.

내려오는 발길이 자꾸 뒤로 끌리는 듯하다. 그래도 괜찮다. 먼 모습이라도 보고 싶은 모습 봤지 않은가. 내일은 또 하고 싶은 일 하러 가지 않는가. 울고 웃을 삶 나누러, 새로운 삶 찾으러 가지 않는가. 그 빛만도 고왔다, 먼 진달래여. 네 미소 속에 묻힐 날 있을 테지-.(2025. 3. 30)

                                                                    

 

어느 날 날씨를 보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뜬금없이 철 아닌 눈이 내려 창밖의 산야를 하얗게 칠해 놓았다. 어느새 비가 뿌리면서 그 순백 세상의 민낯을 여지없이 드러나게 한다. 검은 흙은 검은 흙이고, 마른 풀은 마른 풀이다.

그런가 싶더니 비는 문득 그치고 우중충한 하늘빛이 맑게 흐르는 물도 흐려 보이게 한다. 그것도 잠시다. 세상을 보고 싶어 몸살이라도 난 듯 구름 사이를 어렵게 비집고 햇살이 살포시 내려앉고 있다.

햇살이 힘겹게 뚫어놓은 구름의 문이 스르르 닫히면서 성근 눈발이 날린다. 눈발이 점차 굵어지더니 급기야는 아기 주먹만 한 크기로 내려앉는다. 한겨울에도 만나기가 쉽지 않은 눈 입자들이다.

언제 그런 눈이 내렸는가 싶다. 다시 하늘 문이 열리면서 맑은 햇살이 산과 들을 어루만진다. 이제는 저 구름도 물러나 푸른 하늘빛을 드러낼까. 아니다. 또다시 회색빛으로 변한 하늘에서 가루눈을 뿌려 댄다.

그것도 잠시 눈은 빗방울이 되어 눈의 알갱이를 밀어내고 내려앉는다. 하늘의 먹구름이 무슨 힘에선가 조금씩 밀려나더니 햇빛 몇 줄기가 빗겨 내린다. 그렇게 눈과 비와 구름과 햇살이 얽히고설킨 날이 몇 번 되풀이되는 사이에 날이 저물어간다.

저 날의 변환들을 감당해 내느라 하늘인들 얼마나 숨 가빴을까. 하늘도 밤이 되면 좀 쉬고 싶을 것이다. 환히 개게 할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날씨를 보고 있노라니 문득 내 살아온 걸음걸음이 돌아 보인다.

어느 날 무슨 필요에 따라 주민등록표 초본을 떼어 보게 되었디. 깜짝 놀랐다. 부모님 슬하로부터 분가하여 살게 된 이후로 주소지를 바꾼 횟수가 무려 스물한 번이나 되었다. 젊은 시절 식솔들을 끌고 이리저리 자주 옮겨 다닌 줄은 알았지만. 그토록 잦을 줄은 몰랐다.

대부분 발령지를 따라 봇짐을 싸 들고 옮겨 다닌 것이었지만, 옮기는 과정이며 살아가는 일들에서 희비며 고락이 교차하는 일이 빈번히 벌어지곤 했다. 수십 년 세월 뒤 끝에 선 지금은 젊어 한때 일로 가벼이 넘길 수도 있지만, 그때는 밤잠을 못 이루리만치 고뇌에 빠지기도 하고, 새로운 세상에 기대로 잠을 설치기도 했다.

아이들이 나고 키울 때까지도 셋방살이하면서 내 아이가 주인집 아이와 다투어 다치게 되어 병원까지 가야 했던 일이며, 셋집의 처지를 따라 어려움을 안고 방을 옮겨야 했던 일은 지금 돌아봐도 송연한 아픔이 되어 새겨져 온다.

그러다가 어렵게 작으나마 내 집이라고 마련했을 때의 그 감동이야말로 내 생애에 몇 번 되지 않은 큰 보람으로 안겨 오기도 했다. 그나마도 아이들이 커감에 따라 더 너른 집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 과정에서 또 봇짐을 싸야 했다.

그렇게 마련한 집이었지만, 나는 정착할 수가 없었다. 인사이동을 따라 떠돌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나 혼자 객지를 헤매기도 했고, 아이들이 제 살길을 찾아 떠난 후로는 멀쩡한 내 집은 비워둔 채 아내와 함께 다시 셋방을 전전하기도 해야 했다.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한 집단에 대한 관리 책임을 맡는데 이르게 되어 주어지는 집에서 거처할 수 있게 되었지만, 타관을 유랑해야 하는 일은 멈출 수가 없었다. 절해고도의 섬 살이도 마다치 않고 몇 상자의 짐을 거센 파도를 넘고 넘어 날라 고단한 몸을 눕히기도 했다.

그런 곡절들 속에서 겪는 일들이 힘들기는 했지만, 마냥 고통으로만 다가온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일들을 개척해 나간다는 도전 의지도 없지 않았고, 그 일들이 이루어졌을 때의 성취감으로 밤을 새워 가며 설레어 보기도 했다.

마치 궂고 개고. 맑고 흐리기를 거듭하는 오늘 날씨처럼 내 삶도 그렇게 변환이며 변전을 거듭해 왔다. 그 사이에 세월이 흐르고. 그 세월 속에 숱한 희로애락이 묻혀 가면서 그 흔적이 저 주민등록표에 고스란히 남았다.

이제는 이런저런 세월이 다 흘러가고, 주민등록표에 더 새겨질 흔적도 없게 되었다. 세상의 번다한 일들을 다 떨치고 퇴은 노옹이 되어 산야에 묻혀 산 지도 십수 년이 흘러갔다. 이 주민등록표 그대로 간직하다가 이 세상 영원히 떠났다는 딱 한 줄만 더 새기면 된다.

눈비가 섞바뀌던 날씨는 마치 어느 옛적 일이라도 되듯 하늘에는 드문드문 보이는 구름 사이로 노을빛이 곱게 번져가고 있다. 회색빛 구름마저도 노을에 젖으며 연황빛으로 물들어간다. 이제 해도 쉴 자리로 가야겠다는 듯 산마루 뒤로 서서히 잠겨 가고 있다.

나도 이제 저 노을이고, 저 해다. 무엇을 더 바라랴. 저 빛깔 고운 노을이 되는 일 말고, 가벼이 쉴 자리를 찾아가는 저 해가 되는 일 말고, 무엇이 나에게 더 있어야 하랴. 내 삶을 파노라마로 펼쳐 주고는 갈 길도 일러주는 오늘 날씨를 보면서-.(2025. 3. 20)

                                                                     

 

인디언 십계명

 

책상에 앉아 책을 읽다가 눈에 피로감이 느껴지는 듯해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본다. 살벌하다. 눈이 더 뻑뻑해지는 것 같다. 산이 온통 상처투성이다. 산의 맨살에서 선혈이 낭자하게 흘러내리고 있는 것 같다. 애목 성목 가릴 것 없이 모두 잘려나갔다. 그야말로 인정사정 볼 것이 무차별로 베어버렸다.

그뿐만 아니다. 흉한이 휘두른 흉기에 죽죽 그어진 자상刺傷처럼 비탈을 가로질러 가며 여기저기 파헤쳐져 있다. 베어낸 나무들을 실어내기 위해 파헤친 길 자국이다. 살을 찢는 아수라의 비명이 몸서리치게 들려오고 있는 것 같다. 차라리 눈을 감는다. 창문에 암막이라도 치고 싶다.

크고 작은 것들이 서로 어울려 이루어진 울창한 소나무 숲이었다. 간혹 밤나무며 상수리나무 들도 섞여 있어 밤도 도토리도 구르곤 했다. 사시사철 푸르고 싱그럽고 삽상한 느낌을 주던 곳이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지척으로 다가와 온몸을 청량해지게 했다. 가볍고 시원한 느낌으로 눈길을 다시 책에다 얹곤 했다.

누가 그 산을 누구에게서 샀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나무들을 산판 업자에게 넘긴 모양이다. 산주나 업자나 이득만 취하면 될 일이지, 이것저것 가릴 일은 아예 염두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걸 위해 산을 사고 나무를 판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오고 있는 걸 그들은 알까. 그 산 앞에 창을 두고 있는 죄업일까.

그런 사람들에게 득리하는 일 말고는 무슨 말이 귀에 들 수 있을까. 이럴 때 인디언 십계명을 떠올리는 것은 물색없는 이의 부질없는 상념일까.

그 옛날 인디언들이 삶의 철칙으로 삼았던 십계명 중에는, 그들이 와칸탕카 곧 위대한 정령으로 숭배하는 자연계에 대한 계명 몇 가지가 있다. 그 첫째가 대지는 우리의 어머니, 그 어머니를 잘 보살피라.’라는 것이고, 그다음으로 나무와 동물과 새들, 당신의 모든 친척을 존중하라.’ 했고, ‘모든 생명은 신성한 것, 모든 존재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하라.’라는 계명도 있다.

인디언은 대지를 모두의 어머니라 여겼다. 대지는 모든 것을 낳고 기르고 살게 해주기 때문이다. 봄이면 땅을 함부로 밟지 않는다. 혹 태어나는 것들이 밟힐까 저어해서다.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만큼 갈고, 가꾸고 파고 갈 때는 감사의 기도를 먼저 올린다. 대지는 위대한 정령의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사고팔 수도 없다고 여긴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어떤 푸나무일지라도, 하잘것없는 미물일지라도 다 같이 소중한 생명체로 여길 뿐 아니라, 모두 어머니 대지의 붙이로 소중한 친척으로 여긴다. 함부로 치고 빼앗고 베어서는 안 되고, 서로 존중하면서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했다. 그것들과 사람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믿는다.

특히, 나무에 대한 사랑은 각별하다. 이런 일화가 있다. 나뭇가지 하나를 잘라 지팡이 삼아 걷고 있는 어린이에게 부족의 어른이 나무에게 허락을 구했는지, 필요한 만큼만 잘랐는지, 나무에게 감사를 표시했는지를 물었다. 어린이가 그냥 잘랐다고 말하자 자연에서 무엇을 취할 때는 나무에게 반드시 허락을 구해야 한다며 가르쳤다.

인디언들은 나무도 말을 한다고 믿고 있다. 나무들로부터 날씨, 동물, 위대한 정령 등에 대한 많은 것을 나무의 말을 통해 배운다고 한다. 나무 아래 서 있으면 살아 있는 모든 존재 속에 깃든 무한한 가능성을 실감한다고 했다. 비단 나무만이 아니라 인디언들은 모든 생명, 모든 존재를 신성한 것으로 여겨 항상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했다 한다.

처참한 벌거숭이산을 보며 인디언의 삶과 계율을 떠올리는 나의 상념은 부질없다 할지언정, 인디언들의 이런 계명이 어찌 부질없다 하겠는가. 하지만, 이런 계명이 인디언을 지켜주지는 못했다. 이 계명을 지키고 사는 인디언을 미개한 사람들로 몰아붙이는 흉포한 세력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백인들이다. 신대륙의 발견이라는 미명과 함께 문명의 병기들을 앞세우고, 청결한 자연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아가는 인디언의 땅을 무참하게 침노해 왔다. 신대륙이 아니라 순박한 사람들이 자연의 변전을 더 할 수 없는 진리로 믿으며 오랜 유서와 함께 오순도순 화목하게 사는 땅이었다.

백인들은 자기네 문명을 모르고 살아가는 인디언들을 야만인으로 몰아 내쫓으며, 그 땅의 나무를 마구 베고 파헤쳐 높은 건물을 짓고 철로를 놓기 시작했다. 백인들이 점차 세력을 넓혀가게 되면서 인심이 야박해지고, 전염병이 창궐하고, 범죄들이 만연해 갔다. 백인들은 인디언들에게 계획적으로 전염병을 퍼뜨리기도 했는데, 인디언들은 이를 두고 콜럼버스의 악수라 했다. 인디언들은 서서히 삶의 터전을 잃으면서 쇠잔해져 갔다.

내가 마치 그 인디언이 된 것 같다. 문명한 자본의 폭력으로 인해 그지없이 피폐해져 버린 저 창밖의 살풍경을 늘 마주하다 보면 나의 모든 기력이 소진해 갈 것만 같다. 어쩌랴. 어찌해야 하랴! 저 문명한 사람들의 참혹한 폭력 앞에서-. (2025. 3. 2)

 

[참고] 인디언 십계명

대지는 우리의 어머니, 그 어머니를 잘 보살피라.

나무와 동물과 새들, 당신의 모든 친척들을 존중하라.

위대한 신비를 향해 당신의 가슴과 영혼을 열라.

모든 생명은 신성한 것, 모든 존재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하라.

모두에게 선한 일을 행하라.

모든 새로운 날마다 위대한 신비에게 감사하라.

진실을 말하라. 하지만 사람들 속에선 오직 선한 것만을 보라.

자연의 리듬을 따르라. 태양과 함께 일어나고 태양과 함께 잠들어라.

삶의 여행을 즐기라. 하지만 발자취를 남기지 말라.

                                                                      

 

협착증을 지고

 

허리가 자꾸 아픈 것은 금이 간 척추를 시술한 후유증인 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척주관 협착증이었다. 시술 의사도 처음엔 그렇게 알았던 것 같다. 협착증 치료를 위해 너덧 주에 한 번씩 아들이 사는 대처 시술 병원을 몇 달을 두고 오르내려야 했다. 노화 탓이라 했다.

통증은 이어지면서 좀처럼 낫지 않았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척추 시술 이후부터 그랬다. 척추 시술과 척주관 협착증이 관계가 있는 건 아니라지만, 척추에 일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이리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그런 가정假定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아내가 저 먼 나라로 가출한 지 너덧 달쯤 되던 겨울 어느 날이었다. 방을 나서다가 갑자기 혼절하고 쓰러졌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일어나려 했으나 등이 몹시 저리고 기운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억지로 용을 써서 핸드폰을 끌어당겨 119를 눌렀다.

눈을 떠보니 어느 종합병원 응급실 병상이었다. 쓰러지면서 벽에 부딪혀 얼굴에 타박상을 입고, 그 충격으로 1번 척추에 금이 갔다 했다. 독감에 무슨 무슨 영양소 결핍으로 쓰러진 것 같다 했다. 내 사는 한촌의 병원에서는 감당을 못해, 아들이 사는 대처 더 큰 병원 이송을 주선해 주었다.

두어 주일을 입원하면서 영양소 결핍도 치료하고, 척추에 간 금도 붙였지만, 허리 통증은 잦아들지 않았다. 해를 넘겨 가면서 대소 병원을 전전해도 사그라지지 않는 통증을 지고 지금까지 왔다. 언제 어디까지를 더 가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 치료 받고 있는 병원에서는 12주에서 15주 정도 치료하면 될 것이라 진단했다. 12주를 묵묵히 치료받았지만, 진정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무슨 다른 방법이 없겠느냐 하니 DNA 주사를 몇 주 정도 맞아 보자 했다. 맞고 있지만, 진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허리가 제 기능을 못 하니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통증을 돌아보니, 이 병은 내 삶에 협착증이라는 명사로보다 협착하다라는 형용사로 먼저 찾아온 것 같기도 하다. 사전은 협착하다라는 형용사를 차지하고 있는 자리가 매우 좁다.’, ‘처하여 있는 사정이나 형편이 매우 어렵다.’라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은퇴 생활에 든 지도 십수 년째가 넘어가고 있다. 혈기방장한 시절이 가버린 지가 그만큼 오래되었다는 말이다. 지금 내가 주로 차지하고 있는 자리는 방 안의 책상이다. 책상을 벗어나 강둑이며 산골짜기를 거닐며 물도 보고 새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내가 숨 쉬고 있는 공간이란 세상과는 떨어진 아주 좁은 자리에 지나지 않는다.

바깥세상을 볼 기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한 주일에 한 번씩은 한촌을 벗어나 글을 사랑하고,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즐거움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좋아하는 사람들과 만나 마음과 뜻을 서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내 좁은 삶의 자리에 청량한 숨결을 더해 준다. 내 삶의 자리가 좁은 것은 내가 원해 만든 것이니, 그 건 그리 살지라도, 처지의 곤궁은 어찌해야 할까.

어쩌다 보니 홀로 살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 내 생존과 생활을 혼자 감당해야 했다. 생존은 고단하고 생활은 쓸쓸했다. 무엇 하나 내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의식주 해결이 어렵고, 집을 나서지 않으면 사람을 만날 수 없다. 그런 삶을 힘겹게 버텨 나가던 어느 날, 혼절하여 쓰러지면서 척추에 금 가는 병고를 얻게 된 것이다. 설상가상의 처지가 되었다.

세상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세상에는 늙고 병든 이를 보듬어 주는 제도가 있음을 이런 처지가 되고서야 비로소 알았다. 그 고마운 제도가 고마운 분을 나에게 보내주었다.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는 내 몸의 움직임을 도와주고, 집 안에만 있어도 사람을 만날 수 있게 해주었다.

협착한 자리의 숨결을 더욱 청량하게 도와주는 즐거운 만남이 내게로 왔고, 내 삶의 협착한 처지를 보살펴 주는 분이 내게로 와서 고단한 생존과 쓸쓸한 생활을 그런대로 따뜻하게 풀어나가고 있다. 언제까지 그 청량함과 따뜻함이 나의 것이 될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터이지만, 지금 남은 일은 견뎌내기 쉽지 않은 허리의 협착을 다스리는 일이다. 잘 치유되지 않는다.

믿고 싶다. 내 협착한 자리를 조금이나마 넓혀주는 즐거운 일이 어느 날 나에게로 왔듯이, 내 협착한 처지를 따뜻하게 데워 주는 분이 내게로 왔듯이, 어느 날인가는 내 허리의 협착증도 잘 다스려줄 의술과 그 손길이 나를 찾아오리라는 것을 간곡하게 믿는다.

그 믿음의 길을 따라 오늘도 병원 길을 나선다. 치료가 기대한 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언젠가는 거뜬해지리라 믿음으로 마음에는 협착증이 돋지 않기 바라며 병원으로 향한다. ‘삶의 의미가 있는 곳에, 희망은 살아 있다는 어느 사회운동가의 말을 다시 새기며 걸음을 옮긴다. 협착증 그 허리를 지그시 누른다. (2025. 2. 14)

                                                                  

 

역귀성

 

설날이 내일이다. 아내를 만나러 간다. 아이들을 보러 간다. 눈발이 날린다. 차는 날리는 눈발을 다시 날리며 달려나간다. 잘 달리는 차가 오히려 서럽다. 아이들이 전화하여 핸드폰의 내비를 켜보라 했다. 몇 시에 도착할지가 나온다 했다. 내비를 켠다. 아무 시에 도착할 거라고 알려 준다. 그렇게 아이들이 나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말인가.

(「기다림에 대하여(5)」, 한국수필, 2023.9.)이렇게 글을 쓸 때가 있었다. “……명절이며 무슨 새길 날이면 한촌 늙은 아비 어미를 찾아 달려올 아이들이 기다려진다. 그저 잘 살기만을 바라는 아이들이 의젓하고 정겨운 모습을 하고 안겨 오면 어찌 살갑지 않으랴. 무슨 정성을 들고 올까. 저들의 환한 얼굴이 으뜸 치성이 아니던가.……(기다림에 대하여(5), 한국수필, 2023.9.)

옛날이야기다. 이제 명절이라고 아이들이 찾아올 일이 없다. 늙은 아비 홀로 저들이 있는 곳, 아내가 사는 곳을 찾아야 할 뿐이다. 무슨 환한 얼굴이 있을 거라고 내가 이리 달려가는가. 아내가 그리워하고 있을까, 아이들이 활짝 팔 벌려 맞아 줄까. 눈발은 쉼 없이 날리고 있었다. 천지는 하얘도 길은 까맸다. 차는 서럽게도 잘 달려나간다.

차가 멈추었을 때 눈도 멈추었다. 차를 내렸다. 모자 달린 두꺼운 외투에 마스크까지 썼지만, 아들은 잘 알아보았다. 제 차에 어서 타시라며 가방을 얼른 받아 든다. 아들과 함께 달리는 거리는 휘황한 불빛이며 네온사인이 무슨 축제를 벌이는 듯 현란한 춤을 추고 있다. 녹는 눈이 차장을 눈물처럼 흘러내리면서 불빛이 어룽진다.

아들 집에 이른다. 세찬을 준비하던 아이들이 나와 인사한다. 아내는 아직 오지 않았다. 내일 아내를 맞는 날이다. 아이들과 둘러앉는다. 모처럼 아이들과 여럿이서 밥술을 든다. “참 오랜만에 함께 먹는구나.” 내가 미소를 짓자 아이들도 엷은 미소를 띠었지만, 무언가가 비어 있는 듯했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제 좀 정리도 해야 하지 않을까.……아이들은 묵연했다.

아이들이 펴준 이부자리에 든다. 내일 만날 아내가 꿈으로 미리 올까. 여러 가지 조각 꿈들이 흘러갔지만, 늘 함께 있기에 굳이 꿈속을 올 일이 없어서일까, 아내는 오지 않았다. 내가 일어났을 때 아이들은 아직도 자고 있는 듯 기척이 없다. 집에서 혼자서 하던 대로 체조하고 세수하고 노트북을 펼쳤다. 흘러가던 꿈결 속에서 볼 수 없던 사람을 일기 속으로 부른다.

아이들이 제 어미를 맞을 채비로 부산하다. 네 어미는 평소에도 그리 많은 걸 먹으려 하지 않았어. 뭘 이리 많이 차리냐. 부질없는 잔소리를 주절거린다. 아이들이 들을 리가 없다. , , , , ……, 딴은 진설을 하노라 한다. 아내가 아이들의 이 정성을 흐뭇해할까.

드디어 아내가 왔다. 오랜만이다. 늘 대하는 모습이 아니라 영정으로 지방으로 앉아 있다. 아이들이 기특하다는 듯 미소짓고 있다. 분향 재배하고 강신례를 드려라, 헌작 삽시하고 재배 올려라. 내가 말 안 하면 아이들이 모를까. 아이들이 절 올릴 때 나는 아내를 바라본다. 속을 무던히도 태웠던 나를 반길까. 의례가 끝난 뒤 내가 한 잔 부어 아내 앞에 놓고 넋 없이 바라다가 그 술 내가 단숨에 마셨다.

성묘하러 가잔다. 저들은 수시로 어미를 찾아간다고 하면서도 오늘 같은 날 또 가보고 싶단다. 아직도 아이들에게는 이 세상의 어미다. 차를 달려나갔다. 집에서 멀지 않다. 선대 산소 터가 없지 않았지만, 아들은 굳이 저 가까이에 모시고 싶다 했었다. 궁벽한 한촌에 나만 적적히 남아야 하는 것이 아쉽긴 했지만. 하릴없었다. 나도 나중에는 그리될까.

산에 눈이 많이 쌓였다. 발목이 잠겼다. 눈부시게 펼쳐진 설원에 첫발을 찍으며 숱한 무덤을 지나 아내 집으로 갔다. 구겨지지도 않은 두꺼운 솜이불을 편안하게 덮고 있다. 그 이불 그대로 놔두고 싶었지만, 아이들은 정성스레 벗겨낸다. 김 아무개가 고이 잠들어 있다는 묘지墓誌가 드러난다. 아이들은 주과포를 차려 놓고 절을 올린다. 음각에 남아 있던 눈이 햇빛을 받으며 녹아내린다. 아이들을 반기는 눈물일까. 나는 먼 하늘을 바라본다. 파란 하늘에 조그만 얼룩이 지고 있다.

산을 내려 차를 달린다. 모두 말이 없다. 할 말이 없거나 할 말을 못 찾는 듯했다. 제 어미는 아직 살아있다. 아내가 산집으로 옮겨간 지 이태가 되어 가는데도, 아직 저들 집에 살고 있고, 가족부에도 살아있다. 아내가 살고 있는 아이들 집에 다시 이른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엄마가 채전에 받아만 놓고, 고르지 못한 객토를 봄이 오면 기계를 불러라도 정리해야 하지 않겠느냐?……했다. 보낼 건 보내서 어미가 편히 가서 마음 놓고 쉬게 하자는 말은 차마 못 하고, 아이들 집을 나섰다.

역귀성을 마치고 한촌으로 돌아간다. 아내가 그대로 사는, 쓰던 그릇이며 입던 옷이 그대로 있는 집을 향해 길을 되짚는다. 이 역귀성은 내 산 동안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아내도 아이들도 나도 환한 얼굴로 서로 만날 수 있기를 아리게 비는 일 말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으랴. (2025. 1. 30)

                                                                

 

이웃집 할머니 영희, 박-파안

 

어느 날 밤,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재독 한국인 작곡가를 만났다. 늘 대하는 이웃집 할머니인 줄 알았다. 검은 머리보다 백발이 더 성한 단발머리, 적당히 주름진 얼굴에 짓는 맑은 미소. 우리 동네 할머니들도 즐겨 입을 듯한 스웨터에 조금 헐렁한 바지, 크지 않은 키에 등마저 굽었다. 파킨슨병 때문에 거동이 불편해 보행보조기에 의지해 걷고 있다. 내 사는 마을 어느 할머니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이 할머니의 생애는 범상하지 않았다. 반세기 세월을 독일에 살면서 독일 음악계를 이끌고 있는 한국인 영희, -파안 Younghi Pagh-Paan작곡가. 오랜 세월을 남의 나라에서 살아오고 있지만, 잠시도 고국을 잊어 본 적이 없는 우리나라 사람, 그의 음악 속에는 우리의 얼이 살고 있다. 그런 음악을 창조해 낸다. 그 정신이 그를 더욱 이웃집 정 많은 할머니같이 느껴지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나라가 식민지에서 풀려나던 1945년에 청주 남주동에서 태어났다. 그가 들은 첫 번째 음악은 한국전쟁 때 완전히 폐허가 된 거리에서 어느 걸인이 구걸하며 불던 해금 소리였다. 일곱 살 때 아버지와 장터에 가서 소리꾼들이 판소리와 창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때 국악을 처음 접했다. 열 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고, 열세 살부터는 주한미군방송에 나오는 클래식 음악을 듣고 악보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음악적인 소양을 쌓아 갔다.

열 살 때 여읜 아버지이지만, 교량 건축가인 아버지가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다리를 설계하는 모습이 멋져 보여 자기도 아버지가 하는 일을 해보겠다는 꿈을 가지기도 했다. 아버지가 떠나신 후 형편이 어려워졌다. 피아노 레슨비도 감당하기 힘들어 음악 공부를 중단하면서 청주여중·고를 졸업했다. 아버지처럼 교량 건축가가 되기 위해 서울대 공대를 지원하려고 수학, 물리, 화학 등을 열심히 공부했지만, 음악이 도저히 포기되지 않았다. 재수까지 하면서 결국 음대에 들어간다. 다른 과목 성적이 우수하여 3등으로 합격해 기성회비를 면제받으며 공부했다.

서울대 음대, 대학원 작곡과를 졸업하고 죽을 각오로 공부하여 29세 때 국내에서는 최초로 독일학술교류재단(DAAD) 장학금을 받아 독일 유학길에 오른다. 프라이부르크 음악대학에서 유럽 최고의 음악가들을 만나, 1977년 보스윌 세계작곡제에서 1등 하고, 도나우싱엔 음악제에서 Sori(소리)를 발표하면서 작곡가 영희, -파안이라는 이름이 전 유럽에 알려졌다.

파안파안대소破顔大笑에서 따온 말로, 크게 웃고 살자는 뜻을 담았다. 그 파안과 함께 오직 음악만을 위해 살아오는 동안에 1978년 스위스 보스빌 국제작곡제 여성 최초 1, 1980년 두나오에싱엔 음악제 여성 최초 오케스트라 곡 위촉, 1994년 독일어권 작곡가 최초 여성 교수로 임명되어 부총장까지 역임, 1995년 동양인 최초 독일 하이델베르크 여성 예술인상 수상, 2011년 대학 정년 퇴임, 2016년 본인 이름을 딴 국제 박영희 작곡상제정. 2020년 여성 동양인 최초의 베를린 예술대상 수상 등 화려한 이력을 쌓아 왔다.

그러면서 그의 정신세계는 잠시도 고국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1978년 스위스 보스빌 작곡콩쿠르에서 1등을 한 곡 MAN-NAM(만남)은 신사임당의 시 '사친思親'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고 한다. 이 곡과 함께 2011년 대관령국제음악제에 참가하여 아시아 초연작 타령Ⅵ」은 국악기를 쓰지 않으면서도 한국 전통 장단을 그려냈다고 한다. 2014년에는 고향 청주를 위해 청주시민의 노래를 작곡하였으며, 통합 청주시 제1호 명예시민이 되었다.

어느 날 제자들이 모여 스승의 은혜를 기리는 자리를 마련했다. 보행보조기에 의지해 그 자리에 들어서는 그를 보며 제자들이 박수로 환호했다. 보조기와 함께 빙 돌면서 한쪽 다리와 팔을 번갈아 번쩍 들며 인사하는 세련되지 않은 그 사위가 바로 우리 시골 할머니의 정겨운 모습이었다. 제자들은 그를 위해 우리 가곡 스승의 은혜를 우리말로 부르며 고마워했다.

팔순의 그가 왜 이웃집 할머니 같은지를 알 것 같다. 소박한 외모며 정 많은 마음도 그러했지만, 몸은 이국땅에 있을지언정 정신은 언제나 고국에 두었던 것도 그러하고, 우리의 옛것을 사랑하는 철저한 한국 사람인 것도 그러했다. 초등학생 때처럼 오직 연필로만 눌러가며 악보를 쓰는 작곡 모습도 그러하고, 민족의 얼에서 소재를 가져오는 예술 신념도 그러했다.

그는 병구病軀를 불편하게 이끌고 있지만, 사는 일이 즐겁고도 행복해 보였다. 그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의 예술에서 나온 것 같다. 오직 혼신을 다 바치고 있는 그의 예술이 육신의 고통이며 삶의 간난을 다 넘어설 수 있도록 해준다. 예술에는 그런 힘이 있다.

나는 그와 비슷한 연배로서 같은 시대를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다. 나는 어디에 살고 있는 누구인가가 돌아보일수록 그가 더욱 우르러진다. 뛰어난 작곡가 이웃집 할머니 영희, -파안.

그 영상을 본 날 밤, 머리에 가슴에 새겨진 그 모습이 내 잠결 속을 깊숙이 파고들어 왔다.(2025. 1. 7.)

                                                                      

 

우리가 인생이라고 부르는 것들

 

한 해도 얼마 남지 않은 십이월 어느 날, 연간으로 펴내는 회지 출판기념회 겸 송년회가 열렸다. 회원들이 한 해 동안 수필 공부를 하면서 써온 글을 모아 내는 책이다. 그 성과의 보람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면서, 그렇게 보낸 한 해의 의의를 기려보자며 마련하는 자리다.

회무를 맡은 몇 사람은 그 행사를 어떻게 재미있고도 뜻깊게 꾸며 볼까 하고 궁리를 거듭하고 있었다. 드디어 그날 그 시간이 왔다. 사무국장은 행사 시작 전에 회원들에게 주머니 하나를 내밀면서, 까닭을 묻지 말고 주머니 속 접힌 쪽지 하나 집어서 펴보지도 말고 호주머니 속에 잘 넣어두라 했다. 펴보지 말라니 더 궁금했다.

의식이 진행되었다. 축시 낭송에 이어, 회장이 회지 발간 의의와 그 성과를 자축하는 인사를 할 동안 남몰래 쪽지를 살짝 펼쳐 보니 번호와 한 회원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걸로 무얼 하겠다는 건가? 궁금증이 더해 갔다. 내 궁금증과는 상관없이 한 해 동안 각종 문예 작품 공모에서 입상한 회원들에게 축하 화환을 증정하고, 몇 사람이 나와 책에 실린 자작 수필을 낭독했다.

기념 떡을 자르고 악기 연주에 재주가 있는 몇 사람이 나와 축하 연주를 했다. 어느 회원은 오카리나로 숨어 우는 바람 소리를 불고, 또 두 회원은 기타와 타악기 연주를 반주로 걱정 말요 그대를 불렀다. 그 노래들과 함께 한시를 좋아하는 회원이 주렴계의 애련설愛蓮說을 성독聲讀하는 구성진 목소리에 이르러 출판기념회는 절정으로 오르는 듯했다.

바람 소리는 숨어 우는데, 숨겨 둔 쪽지는 언제 펼쳐 볼 수 있는 걸까? 걱정은 없지만, 궁금증은 더해 간다. ‘연꽃은 멀리서 바라볼 수 있으나 함부로 만질 수는 없다.可遠觀而不可褻玩하는데, 함부로 펼쳐 볼 수 없는 것이 내 주머니 속에 있다. 큰 글씨로 적힌 그 번호며, 그 아래 적힌 이름은 무엇인가. 펼쳐 볼 수 있는, 펼쳐 봐야 하는 순간이 마침내 다가왔다.

사회자의 멘트가 이어진다. “여러분들, 지금까지 수필 낭독도 잘 듣고 노래 연주도 잘 감상하고, 귀한 한시 성독도 감동적으로 들으셨지요? 이제 우리 출판기념회가 절정으로 갑니다. 기대해 주십시오.” 만면에 피운 웃음으로 좌중을 둘러 본다. “더 즐겁고 재미있게 진행하기 위해 자리를 만찬장으로 옮겨서 진행하겠습니다.” 만찬장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만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의식 행사 자리와 층을 달리한 가까운 자리에는 맛깔스러운 술과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모두 자리에 앉아 한 해를 보람되게 정리하고 새해를 새 뜻으로 맞자는 회장님의 건배사에 이어 사무국장은 맨트를 이어나갔다.

……우리가 수필 공부하면서 선생님께 늘 듣던 말씀이 있지요? 쓰기와 읽기는 항상 같이 가야 한다는 말씀, 쓰기의 바탕이 곧 읽기라는 말씀을 우리는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깊이 새기면서 그 뜻을 어떻게 이 출판기념회에서 새겨 볼까 하는데, 회원 한 분이 멋진 아이디어를 내셨습니다.……그 회원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 아이디어가 책 나누기를 하는 것이란다. 쪽지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다. 이 자리 참석 준비물로 좋은 책 한 권씩 지참하라 했던 예고를 상기시켰다. 각자 가진 책을 들고, 쪽지를 펼쳐 놓으라 했다. 또 한 주머니에 든 같은 내용의 쪽지 하나를 회장님이 제일 먼저 뽑아서, 회장님 책을 그 번호 이름이 불린 회원에게 주면, 책을 받은 회원이 쪽지를 뽑아 그 번호와 이름을 불러 책을 주는 순서로 진행될 것이라 했다. 사슬처럼 이어나간다는 거다.

모두 둥그런 눈동자들 이리저리 굴리기에 바빴다. 어떤 이 무슨 책이 누구에게, 그 책을 받은 이는 무슨 책을 누구에게? 번호와 이름을 부르면 불린 이는 뛰어나가 책을 받고, 그 사람은 또 누구를 뽑아 자기 책을 주었다. 갈채와 환호가 쏟아졌다. 자기가 아껴 읽던 책을, 새로 나온 좋은 책을, 베스트셀러를 곱게 포장도 하고 예쁜 리본도 달아 책에 대한 해설을 곁들여 건네주었다. 그중에는 한강 작가의 노벨상 작품도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술의 흥도, 음식의 맛도 더욱 정겨워져 갔다.

사회를 맡은 사무국장의 추첨 순서가 되었다. 몇 번 누구하고 부르는데, 나를 부르는 게 아닌가! 회원들 모두 친한 사람들이지만, 사무국장과 나는 특히 대화를 많이 나누었던 사이다. 나에게 건네주는 책 제목도 심상찮다. 시 해설을 잘하는 정재찬 교수의 시 강의집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이었다. 정다운 사람으로부터 좋은 책을 받는다는 게 여간 기쁘지 않았다. 내가 추첨할 차례다. 이 무슨 기막힌 우연의 장난이란 말인가? 나에게 불린 사람은 바로 사무국장이었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며 모두 환성을 터트렸다.

나는 사무국장에게 계간 수필 전문지를 주며 말했다. “우리가 다양한 교양을 담거나 깊이 있는 사색을 새긴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으로 어떤 글을 쓰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글쓰기에 중요한 공부가 될 것이라 했다. 국장과 나는 둘이 서로 주고받은 셈이다. 책 나누기는 이어지고 송년 분위기는 점점 뜨거워져 갔다. 이슥한 시간이 흐르고, 내년에는 더욱 좋은 글로 쓰기의 보람을 찾아보자며 자리를 일어섰다.

내가 받은 책에는 마음, 공부, 가진 것, 동행, 열애, 배움, 건강 등 우리기 인생이라 부르는 많은 것들에 관한 시와 사색이 담겨 있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쓰기와 더불어 오늘 우리가 함께한 일들이 모두 인생이라 할 수 있겠지만, 특히 책 나누기는 이 모든 것을 함께 나누었던 이벤트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 책들 속에 인생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지 않으랴. 우리가 인생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것들이-.(2024.12.31. 0:10)

                                                                      

 

창밖의 벌목

 

둔탁하면서도 날이 선 기계톱 소리가 마을 안까지 요란하게 들려온다. 마을 남쪽 산에서 나무를 베고 있는 소리다. 그 산 앞에 작은 산이 하나 더 있어 함께 골짜기를 이루고 있는데, 산의 벌목은 산허리 넘게 올라와 앞산의 능선을 올라섰다. 산마루에 이르도록 모두 베어낼 기세다. 나무를 베어내는 잔인한 톱질 소리와 함께 처절한 산의 비명이 마을을 흔들고 있다. 마치 동물이 제 가죽이 벗겨질 때 지르는 비명 같은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 소리는 나에게 더욱 참혹하게 들려오는 것 같다. 저 산을 정면으로 비추어 주고 있는 내 방의 창이 그 소리를 적나라하게 전해주고 있다. 굴착기는 산허리를 가로질러 그 허리를 꺾을 듯이 파내고 있다. 베어낸 통나무를 쌓기 위한 자리며 실어낼 길을 만들려는 모양이다. 나무를 저리 마구 베어내서, 산의 가죽을 저리 처참하게 벗겨내서 어쩌겠다는 건가. 물론 대가를 얻기 위해서일 것이다.

지금부터 수년 전, 가을 어느 날이었다. 여느 날처럼 맑은 물이 흐르는 강둑길을 유유히 걷고 있었다. 날마다 걷는 나의 산책길이다. 흰 구름이 새맑게 떠 있는 고요한 물을 보며 걷고 있는데, 난데없이 둔중한 중장비 소리와 함께 기계톱 돌아가는 소리가 강물을 들쑤셨다. 고개를 돌려 보니 강둑 끝자락에 서 있는 산을 굴착기가 파헤치는 소리, 나무 베는 소음이 혼란스럽게 뒤섞이고 있었다.

작업을 지시하고 있는 산주를 만났다. 자기가 이 산을 샀다며 산림을 경영해 볼 것이라 했다. 산에 길도 내고 나무도 다듬고 버섯 같은 것도 재배해 볼 것이라 했다. 저 나무들은 그런 일을 위해서 베어내는 것이라 했다. 그때는 산 아랫자락의 나무들만 베어내고 있었다. 나중에 보니 산을 파헤쳐 낸 길의 가장자리에 막대 같은 걸 나란히 꽂고, 거기에 무슨 시구詩句 같은 글귀가 적힌 나무판을 갖다 걸었다. 길가에는 마리골드를 심어 꽃을 피우게도 했다.

시인인가, 아니면 시적인 정서의 세계를 동경하고 있는 사람인가 싶어 호기심과 기대가 섞인 마음으로 나도 그 길을 오르고 내려 골짜기로 들곤 했다. 해가 바뀌고 계절도 바뀌어 갔다. 산을 파내어 낸 길에는 흙이 사태를 이루어 내려앉고, 길이며 나무를 베어낸 자리에는 잡풀이며 애목이 무성해져 갔다. 글귀를 걸어 두었던 막대며 그 글귀들은 다 치워졌는데, 허물어진 길이며 뒤엉긴 푸나무들은 그대로 방치되고 있었다.

산주가 경영을 쉬어가려는지, 뜻을 접었는지 무심한 시간들이 흘러가고 있는 사이에 풀숲길이 된 그 산길에는 몇 포기 남은 마리골드와 함께 취나물, 물레나물, 등골나물, 짚신나물 등 갖은 풀들이 꽃을 피워냈다. 길이며 산을 이리 버려둘 바에야 왜 파헤치고 베어내고 했단 말인가. 이 풀꽃들을 두고 꽃을 갖다 심은 건 또 무엇인가. 산주의 소식은 아는 사람도 없고 알려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기계톱 소리가 진동하면서 나무들이 맥없이 쓰러지고 있었다. 마구 베고 자르고, 찍고. 파헤치고, 끌어내고, 대항군도 없는 전쟁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었다. 이 산을 반드시 제패하고 말리라는 듯, 그 비장한 각오가 예리하고도 둔탁한 기계음이 되어 산을 요동치게 했다. 산주가 어디서 무얼 하다 이제 나타났는지, 를 걸던 그 사람인지, 잇속에 잰 이로 바뀌었는지, 그 사람이 표변豹變한 건지, 알 사람은 알지 몰라도 관심 두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알아봤자 어찌할까. 제 산 제가 벗겨 먹는 걸 무어라 할 것인가 하는, 그런 생각들을 모두 하고 있는 것 같았다. 1990년대 미국에서 무분별한 개벌皆伐에 반대하여 목재전쟁을 벌이던 사람들은 나무에 몸을 묶고 벌목꾼들과 감옥행도 불사하면서 치열하게 싸웠다지만, 그건 먼 나라 남의 이야기일 뿐. 어떤 잇속을 가진 사람이 처참한 광경을 벌이든 말든, 누가 남의 일에 나서려 할까.

나만 속이 탈 뿐이다. 오직 나만이 피해자인 것만 같다. 책상에 앉기만 하면 봐야 할 수밖에 없는 저 산, 전진戰塵이 들끓고 있는 저 장면을 어찌해야 하는가. 마구 나뒹굴어진 시신들이며, 어느 무속 의식 제상에 차려졌다는 가죽을 모두 벗긴 소 사체 같은 저 산을 날이면 날마다 시시로 때때로 어찌 바라보아야 한단 말인가. 볼수록 생각할수록 전율만 솟을 뿐이다.

내 이 끔찍한 피해를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는가. 저들의 사유재산 앞에서, 그 당당한 자유 앞에서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나무가 저렇게 쓰러져도, 산이 저리도 발가벗겨져도 나는 할 일이 없다. 어서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일 말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봄이 오면 베어진 그루터기 사이에도 풀은 다시 돋고 꽃도 새로이 피어날 것이다. 베어지고 파헤쳐진 상처를 딛고 새로운 생명을 돋구어낼 것이다. 그것만 기대하는 것으로 아린 마음을 다스릴 수는 없지만, 그 생명을 믿는 수밖에 없다. 내가 믿든 안 믿든 그 생명들은 힘차게 올 것이다. 반드시 올 것이다.

인간의 폭력 앞에서, 자연의 생명력 앞에서 나는 할 일이 없다. 참 무력하다. (2024. 12. 19)

                                                                    

 

전동 스쿠터를 타다

 

내 힘을 별로 들이지 않고 내 뜻대로 길을 달려 보기는 평생 처음이다. 지금까지는 가쁜 숨에 땀을 닦아가며 달리거나, 달려주는 기기를 위해 상당한 비용을 치르면서 달려야 했지만, 지금 나는 힘도 비용도 아주 적게 들이면서 내 뜻을 따라서 가는 길을 달리고 있다.

흘러가는 세월이 내 땀으로 내달을 수 있는 길을 거두어갔다. 한 발 한 발 디뎌 걸을 수 있는 길을 내어주는 것만으로 만족해하고 감사해하며 걸어야 할 처지가 되었다. 그것도 힘닿는 데까지다. 그 한계를 넘어서면 다른 것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

가장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자전거다. 자전거는 걷는 것보다는 적은 힘으로, 걸어서 갈 때보다는 더 먼 길을 갈 수 있게 주는 이기다. 그렇지만 자전거도 내 힘을 적지 않게 들여야 갈 수 있다. 두 바퀴로 달리려면 균형 감각을 잃어서도 안 된다.

세월의 심술은 그 이기를 쓰는 것마저도 만만치 않게 했다. 오르막을 달리기는 걷는 것 못지않게 힘 들뿐만 아니라, 내리막을 달리는 것도 긴장을 늦추면 안 된다. 세월은 그 힘이며 그 긴장마저도 거두어가려 할 때가 있다.

나에게는 차도 없고, 차를 몰아본 적도 없다. 기계 조작에 손방인 탓이겠지만, 그 기계가 가지고 있는 속성이며 속도를 감당할 자신이 서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면허 시험에 한 번 낙방하고는 흥미도 자신도 싹 잃고 말았다.

그렇다 보니 나에게 남은 교통수단은 걷기와 대중교통뿐이게 되었다. 달리기는 못 해도 걷기는 열심히 하고 있다. 걷기는 나의 교통수단일 뿐만 아니라 건강 유지의 유용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걷기에 먼 길은 조금 불편이 따르긴 해도 대중교통 수단을 잘 이용하고 있다.

문제는, 걷기에는 조금 멀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는 그리 먼 길도 아니거나 이용할 수도 없는 길을 갈 때다. 예컨대, 농협에 가서 금융 볼일도 봐야 하고, 우체국에, 면사무소에 가서 소용되는 일도 해야 할 경우가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자전거 이용도 만만찮은 지금-.

아들이 전동 스쿠터를 권했다. 그것인들 속도가 나는 기계가 아닌가. 여러 가지 조작법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 염려하지 않아도 좋을 거라 했다. 조작도 아주 간단하고, 속도도 사고 위험이 별로 없을 정도로 나는 것이라 했다.

그러면 어디 한번 타볼까? 마트에 가서 생필품도 사 와야 하고, 때로는 동행인도 함께 탈 수 있는 게 있겠느냐 하니, 있다며 주문하여 보내주었다. 간단한 조작으로 짐칸을 좌석으로 바꿀 수 있는 삼륜 스쿠터였다. 충전만 잘하면 웬만한 거리는 내왕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운전도 어렵지 않았다. 오른쪽 손잡이를 틀어주면 나아가는데, 트는 각도에 따라 느리게도 빠르게도 할 수 있다. 그 각도만 주의해서 잘 틀면 별 위험은 없을 것 같다. , 후진 변환과 굽이 돌기에 유의해야 할 것 같다. 브레이크는 자전거와 같아 익숙하다.

잘 달려나갔다. 새 세상을 달리는 것 같았다. 핸들만 잘 잡고 있으면 내가 원하는 속도로 내가 필요한 곳을 큰 힘 들이지 않고 달려나갈 수 있다. 나에게는 새로운 세상, 그 세상으로 가는 길이 열리는 듯했다. 세월의 심술도 말려 줄 듯했다.

바르게 난 길도 달려 보고, 굽잇길도 달려 본다. 우리 인생도 그렇고 내 삶도 그랬던가. 굽잇길 달리기보다는 바른길 달리기가 쉽고도 편안하다. 내 살아오면서 바른길이 어디에 있는 줄 몰라 굽이진 험로를 헤맨 적은 없었던가.

굽잇길 돌기가 얼음판같이 조심스럽긴 해도 그런 길이 없다면 바른길인들 어찌 있으랴. 굽잇길이 없다면 바른길의 편안을 어찌 알 수 있으랴. 바른길도 굽잇길도 모두 내가 달려야 할 길이다. 굽잇길을 단련하다 보면 바른길 달리기도 더욱 편해질 것 같다.

주의를 기울여 달려야 하기는 바른길과 굽잇길이 다를까. 삶의 길인들, 이 스쿠터의 길인들 한눈을 팔지 말고, 긴장을 풀지 않고 달려야 함이 다를까. 내 살아온 길이 새삼스레 돌아보지만, 돌아보기는 차를 내려서 해야 할 일, 오직 앞만 보고 달릴 일이다.

농협 마트로 갔다. 선물 상자 몇 개를 샀다. 나에게 인정을 베풀어준 이웃들에게 작은 정성이나마 전하기 위해서다. 짐칸에 싣기가 편리하다. 이 탈 것이 아니면 이런 걸 어떻게 옮길 수 있으랴. 이웃에 진 신세를 조금이나 갚을 수 있다 싶어 마음이 유쾌해진다.

이 스쿠터가 준 유쾌가 아닌가. 이 차를 아끼고 사랑할 일이다. 오래오래 유쾌해지기 위하여-. 많이 타고 잘 타는 것만이 아끼고 사랑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이 차에 너무 의지하지 않는 것도 아끼는 일일 수 있을 것이다.

세월의 심술을 녹여 보리라며 이 차에 모든 행보를 맡기다가 내 발걸음이 쇠퇴해지면 어쩌랴. 내 건강이 쇠해지면 어찌하랴. 이 차를 아껴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부지런히 걸을 일이다. 안전하게 타기 위해서라도 힘내어 걸을 일이다.

달려온 스쿠터를 창고에 들여 쉬게 하고, 늘 걷는 해거름 산책길을 나선다.

걸음을 가볍게 옮겨 나아간다. (2024. 12. 6)

                                                                   

 

수필이 고맙다

 

수필이 고맙다. 수필로 인연한 사람들이 고맙다.

내가 사랑하는 수필로 좋은 글을 남기지도 못하고, 빛나는 이름도 얻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내 속에 흐르고 있는 문학의 피는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학창 시절에는 시에 관심을 가지고 교과서 읽기보다는 시집 읽기를 좋아하고, 시를 좋아하는 마음이 시를 쓰게 만들었다. 시를 열심히 쓰면서 문예반장으로 활동도 하고, 문학 동아리 활동도 관심을 빠뜨리지 않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로 나왔다. 바쁘게 사회생활을 하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시는 나에게서 시들해져 갔다. 모든 걸 비유와 상징으로 응축해야 하는 시에는 별 재주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글에 대한 향수는 가시지 않았던지, 몇몇 지면에 잡문을 가끔씩 내밀곤 했었다. 상사며 상부 기관으로부터 글 사역을 자주 받으며 그런 일로 출장도 많이 다니곤 했다.

그런 세월이 흐르고 있던 어느 날 영남일보로부터 교단 칼럼을 맡아 달라는 청탁이 왔다. 근 두 해 동안 대구의 교사 한 사람과 번갈아 가며 썼다. 그러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수필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 칼럼이 수필과 인연을 맺어 주었다고 할까.

어느 교육 월간지에서 문예 작품 현상 모집을 하는데 응모했다. 내 수필이 심사위원장인 박연구 수필가의 무더운 여름날 소나기의 시원한 맛같다는 평과 함께 최우수작으로 뽑혔다. 이어서 박연구 수필가가 주간으로 발행하던 수필공원에 추천받게 되었다. 그 후로부터 수필가라는 이름을 걸고 글을 써 온 지가 근 삼십 년이 되었다.

수필과 인연 이야기가 너무 길었는가. 그런 인연에도 불구하고 만인의 눈에 뜨일 글, 지가를 높여 줄 책 같을 걸 남기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가수는 안 해도 노래는 안 부르고 못 살겠더라는 어느 가수의 고백처럼, 수필가는 안 해도 수필은 안 쓰고 못 배기게 된 나의 삶을 돌아보며 깊은 감회에 잠기곤 한다.

독자가 많이 읽어 주면 좋은 일이고, 그러기를 바라고 있지만, 설령 읽어 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서운해하지 않고 쓴다. 내 글이 필요하다고 청탁해 오면 기꺼이 응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쓰기도 하지만, 내 글을 찾는 곳이 없다고 할지라도 얼마든지 독자와 소통할 수 있다. 카페며 블로그 같은 온라인 시스템이 얼마나 발달해 있는가. 그런 매체에서 이일배의 수필 사랑은 나의 집필실이기도 하고 독자와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게 나는 쓰기의 즐거움을 누리며 살고 있다.

그 번다했던 사회생활도 끝을 내고, 지금은 십수 년째 은퇴 거사로 살고 있다. 직업 사회에서는 은퇴했지만, 내 문학 생활은 더욱 왕성한 현역 거사로 살고 있음에 늘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수필을 쓰고 있으면 슬픔도 기쁨이 되고, 괴로움도 즐거움이 된다. 수필이 무엇인가. ‘삶의 고백이 아니던가. 삶을 털어내는 사이에 내 심중이 정화되고, 그 정화가 생애의 동력이 되고 있음에 늘 감사하는 마음을 안고 산다.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어쩌다 보니 사궁지수四窮之首 되고 말았다. 모두 내 탓이오, 내 운명의 소치겠지만, 때로는 외롭고 서러운 상념이 안겨 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내가 살아 있기에 그런 거라고 스스로 쓰다듬어 보기도 하지만, 그 마음을 잘 이겨내지 못할 때가 없지 않다. 그때 나는 모니터를 마주하고 앉는다. 광기에 찬 듯 쏟아낸다. 그 마음을 적어도 좋고, 다른 상념을 풀어나가도 좋다. 쓴다는 그 자체만으로 모든 게 맑아지고 밝아진다.

수필이 나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일은 또 있다. 매주 한 번씩 수필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만나는 일이다. 어느 도서관에서 열어준 평생교육 수필창작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이 왜 그리 좋고, 어찌 그리 많은 정이 묻어나는가. 수필 이야기는 문장 이야기만이 아니다. 저마다 다른 삶을 풀어내는 글을 읽으며 함께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그사이에 서로 더할 나위 없는 벗이요,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가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고 즐거움인가.

자기 글을 함께 읽는 날이면 무어라도 들고 안고 와 함께 나누는 마음은 나만의 기쁨과 즐거움이 아닌 것 같다. 한 주일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서로 그리운 사람들이 된다. 한 주일을 그렇게 기다리며, 미리 보내준 함께 공부할 글을 읽고, 공부한 후에 보내오는 글을 다시 읽어 함께 볼 매체에 올려 공유하는 일은 또 얼마나 즐거운가.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쉼 없이 소통하고 있는 것이다.

이래저래 수필과 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그런 수필에 깊어지는 흠모의 마음이 수필은 나의 친구요, 애인이요, 아내라 해도 빈말이 될 수 없고, 삶의 지팡이요, 기둥이요, 지붕이라 해도 헛말이 아니게 한다. 잠 못 이루는 어느 밤에 이 글을 쓰고 있다. 다 쓰고 나면 달고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을 것 같다. 수필이 나를 토닥여 줄 것이다.

수필이 고맙다. 수필로 인연한 사람들이 고맙다. (2024. 11. 26. 04:17)

                                                                     

 

영혼 없는 문자

 

우리는 일상 속에서 주변 사람들과 많은 말을 주고받으며 산다. 바로 말의 존재 이유일 것이다. 특히 요즈음같이 에스앤에스가 발달한 시대에는 시간과 거리에 상관없이 여러 사람과 많은 말을 주고받는데, 그때의 말은 주로 문자가 많이 이용된다. 글말인 문자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면서, 정감 있는 그림 속에 넣어 그 말을 더욱 정답게 만들기도 한다.

어느 한 사람이 아름다운 그림 속에 받는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도 할 아주 감성적이거나 희망적인 문자를 넣어 보내면, 그 문자를 받는 사람은 혼자만 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전파하기도 한다. 전파자는 누구의 마음을 보내는 걸까. 자신의 마음일까, 원작자의 마음일까? 그렇게 받는 문자들에서도 보내는 이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까? 읽어야 할까?

오래전 학교 동기 한 친구는 나날 아침마다 정해진 시간에 예쁜 그림 속에 좋은 말들이 적힌 메시지를 보내온다. 아름다운 꽃 그림 속에 오늘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 행복한 하루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항상 건강하세요, 사랑합니다.” 그리 깍듯하지 않아도 무방한 사이이거늘 그리도 정중한 기원을 보낼까.

어느 날은 어여쁜 여인이 장구를 연주하고 있는 그림 속에 소중한 사람은 언제나 마음속에 있어요. / 처음처럼 변함없는 마음 보석처럼 빛나는 사람 오늘도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라 한다. 마치 연인에게 보내는 사랑의 메시지 같다.

또 어느 날은 한복으로 곱게 단장한 여인이 울긋불긋한 단풍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 속에 가을이 점점 깊어져 갑니다. 차가운 날씨에 건강 조심하시고 익어가는 가을과 함께 기쁨 가득한 하루 보내세요.”라 했다. 고마운 말이지만, 왠지 말이 허공에 떠 있는 것 같다.

그런 말들을 받고만 있기가 멋쩍어서 한번 내 문자를 적어 보냈다. “잘 계시는지? / 나를 위해 하루도 안 빠지고 이렇게 좋은 말과 함께 기도를 다 해 주시니 정말 감사하네~!! ㅎㅎㅎ / 좋은 일 많으시게~!!”

ㅎㅎㅎ를 붙인 까닭을 알까? 그 웃음의 의미를 알아챌까. 좋은 말에 대한 기쁨의 웃음일 수도 있지만, 왠지 공허하게 느껴지는 문자들에서 오는 빈 웃음일 수도 있다. 보내오는 말들이 좋은 말이긴 하지만, 친구의 마음들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누구한테 받은 걸 그대로 나한테 무심히 전달한 것이라면 얼마나 공허한 일인가.

고교생 시절 문우로 친하게 지냈던 어느 여류 문인의 글을 50여 년 만에 어느 문학지에서 놀라움으로 대했다. 반갑고 그리운 마음에 프로필 끝에 적힌 이메일 주소를 보고 당장 편지를 보내 어렵게 연락되었다. 서로 반가운 마음으로 흘러간 옛일을 회억하면서 그간의 안부를 나누었는데, 일찍이 미국에 이민해서, 거기 한인 사회에서 문학 활동을 하다가 노경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와 살고 있다 했다.

사는 곳이 다르고 멀어 만날 수는 없지만, 자주 연락은 하고 살자며 주로 에스엔에스로 소식과 마음을 주고받고 있다. 그렇게 마음을 나누어 가던 어느 날, 활짝 핀 해바라기 그림과 함께 늘 생각나는 사람 / 함께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진심일 수도 있고, 남의 마음을 빌린 것일 수도 있다 싶어 정말~?!” 이라고 한마디 답장을 했더니. 함박웃음을 터뜨리는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그 웃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무릇 말이란, 무슨 말이든 그에 걸맞은 의미와 함께 말하는 이의 영혼이 담겨 있어야 한다. 의미도 물론 중요하지만, 영혼이 없는 말은 한갓 소음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언어가 진정한 의사소통의 수단이 되기 위해서는 서로의 영혼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요즈음 에스엔에스에 떠도는 문자들을 보면 단순한 말장난이거나, 안 해도 좋을 말이거나, 남에게 받은 것을 다른 이에게 무의미하게 전달, 전달하는 게 대부분이다. 이런 일들이야말로 공해요, 전파 낭비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거기에 무슨 영혼을 기대할 수 있는가. 이런 매체들을 통하여 가짜뉴스가 횡행하는 것은 또 어찌 보아야 하는가. 그런 것에 어찌 영혼이 있다 할 것이며, 있다고 한다면 아주 사악한 영혼일 것이다.

하기야 영혼 없는 말로는 어찌 에스엔에스 문자뿐이랴. 일상 언어에선들 영혼 없는 말이 없을까. 특히 정치인들의 험한 말들을 보라. 그들의 말에 어찌 영혼이 있다 할 것이며, 있다면 가짜뉴스에서보다 더 사악하고 추악한 영혼이 깃들어 있을 뿐이지 않을까.

나를 돌아볼 차례다. 나는 그 누구에게 영혼 없는 문자를 보낸 적은 없는가. 소음에 지나지 않는 말을 한 적은 없는가. 영혼 없는 말이 필요치 않은 삶이 되고, 영혼 없는 말이 용납되지 않는 사회가 된다면, 한층 더 따뜻한 삶이 되고, 믿음직한 사회가 될 것이라는 상상과 기대에 젖어 본다. (2024. 11. 3)

                                                                   

 

댑싸리 전설(2)

 

댑싸리는 올가을에도 더는 붉을 수 없을 것 같은 짙붉은 물이 들었다. 아내는 올해도 그 붉은빛을 볼 수가 없다. 그런 채로 저 붉은빛은 씨를 남기면서 하얗게 바래 갈 것이다.

지난해 초여름 가료를 위해 아이들 집에 가 있던 아내가 당부한 말을 따라 그렇게 심었던 대로 올 초여름에도 어린 댑싸리를 문간 어름에 한 줄로 나란히 심었다. 그 댑싸리가 여름을 보내고 가을이 흘러가는 사이에 연두색에서 초록으로 빛을 바꾸어 가며 무럭무럭 자라다가 이제 그 푸른 고비도 넘어 새빨갛게 물이 들었다.

아내는 자기가 씨 뿌려서 난 모종을 한 줄로 보기 좋게 심어 달라 해놓고 초록으로 제법 북슬북슬한 자태를 이룬 한여름 어느 날, 그 모습을 영영 볼 수 없는 나라로 가버렸다. 지금처럼 가을이 이슥해져 그 붉게 타는 모습을 나 혼자 보아야만 했다. 그 빛깔은 내 안으로 들어와 타고 있었다.

그렇게 혼자서만 댑싸리를 지켜보며 지내던 작년 어느 겨울날, 그 댑싸리가 한살이를 마치고 씨를 흩뿌리고 거두어질 무렵이었다. 오직 혼자뿐인 방안에서 쓰러진 채 잠시 내 생애에서 완전히 지워진 혼절의 시간을 맞아야 했다. 119에 겨우 실려 어느 병원 응급실로 갔다가 아이들이 사는 대처의 큰 병원에 누워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119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 전화번호를 보고 위치 추적을 할 수 없었다면, 어느 땐가 백골이 되어서야 발견될지도 모를 일이었었다.

진단 결과는 체내에 있어야 할 무슨 무슨 요소가 결핍되어 쓰러지면서 그 충격으로 척추 한 부분에 골절이 났다는 것이다. 그 댑싸리를 홀로 보면서 지내온 시간들이 내 몸에 해찰을 부린 모양이었다. 평생 처음 홀로된 삶을 겪다 보니 그 시간들이 나를 만만하게 본 것 같다. 두어 주일 후에 온전치 못한 육신을 끌고 겨우 집으로 돌아왔지만, 나에게 안긴 건 이지러져 가는 몸과 빈방뿐이었다.

막막하고 캄캄했다. 절대 희망도 없듯 절대 절망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나라에서 알고 내 생애를 도와줄 사람을 보내주었다. 나에게로 온 그 사람은 나라에서 보내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서 보내준 사람 같았다. 먹고 입고 치유하며 지내야 하는 몸뿐만 아니라 의지하고 위안받고 싶은 마음까지도 채워주기에 애썼다.

그런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파릇파릇 돋아나는 모든 것 속에 댑싸리 파란 싹도 앙증맞은 얼굴을 내밀었다. 저들이 돋아나기를 바라며 씨를 뿌린 적도 없건만, 겨울 들머리에서 마른 것들이 남기고 간 씨앗에서 돋아난 것이다. 아내가 몰래 와서 뿌리고 간 것 같기도 했다. 그때도 아내는 나에게 말도 없이 씨를 뿌렸었다.

그래, 그 씨 뿌려놓고 간 아내가 저들 솟은 것을 솎아 한 줄로 심어 달라고 했지. 아내 말대로 한 줄로 옮겨 심었지. 그 봄이 흘러갔다. 댑싸리는 내 속을 알고 있기라고 하는 듯 잘 자라 주었다. 그중에는 자리기를 꾸물대는 것도 있었지만, 다들 아내가 기대했을 복슬복슬 탐스러운 모습으로 자라 주었다.

저것 좀 봐요, 참 이쁘지 않아요?”

아내가 아닌, 내 생애를 도와주는 분에게 말했다.

그러네요.”

짧은 말을 했다. 그는 알 리가 없다. 저걸 내가 왜 한 줄로 저렇게 심었는지를. 내가 왜 이쁘다고 하는지를-. 조금은 쓸쓸한 심사가 속을 쓸어내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는 내가 세상을 견뎌 나가는 일을 위해서 스스로 할 일을 찾아 성심을 다해주고 있는 분이다.

점점 더 복스러워지면서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크기는 달라도 자랄 대로 다 자란 것 같다. 가을 소슬한 바람에 흔들리면서 푸른빛이 붉은빛으로 바뀌어 갔다. 어느새 온통 붉은빛이 되었다. 아내가 씨를 뿌려놓고, 그 싹을 집 문간 고샅에 그렇게 옮겨 심으라 해놓고 자기는 못 보았던 빛깔이다.

지난겨울에 얻은 병의 뒤가 아직도 남아, 병원 길을 나서던 날에도 댑싸리는 붉게 타고 있었다.

도와주는 분은 내 길 채비를 도와주면서 문간 배웅을 나왔다.

빛깔이 참 곱지요?”

불타는 것 같네요.”

내 년에도 또 저렇게 가꾸어야겠어요.”

내 속도 타오르는 것 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잘 다녀오시라며 손을 흔들었다.

아내가 못 본 것까지 내가 보고 보리라 속을 여미며 병원 길 차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2024.10.23.)

                                                                     

 

세월의 자국을 넘어서

 

커다란 거울이 터미널 화장실 입구 옆벽을 가득 채우고 있다. 화장실을 가도 무심히 그냥 지나칠 수도 있고, 차에 오를 시각이 임박하여 급히 가다 보면 눈 돌릴 겨를이 없어 거울을 지나치기도 한다.

어느 날 차 탈 대비로 화장실을 들면서 우연히 거울 쪽을 곁눈질하게 되었다. 허리 구부정한 웬 늙은이 하나가 중절모를 쓰고 한 손에는 가방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가는 모습이 언뜻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 싶어 다시 고개를 돌려보니, 바로 나였다.

낯선 모습이다. 내 언제 저리 허리가 굽어졌으며, 모자 아래로 드러나 있는 머리카락은 왜 저리 허옇게 보이는가. 집에서 반듯하게 서서 거울을 볼 때와는 영 딴판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런 모습이 되어 있었구나.

점점 늙어가는 줄이야 모를 리 없다. 기력도 날로 여려지는 것 같고, 몸 기능들도 제 노릇 해내기에 조금씩 힘들어한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볕 쨍쨍한 한낮보다, 불그레하게 물들어가는 석양이 더 정답게 느껴지는 것은 마음도 늙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내 늙은 모습이 저런 모습일 줄이야. 허리가 좀 쑤실 때가 있긴 해도 걸을 때는 바로 설 수 있다고 여겼었다. 아니, 별생각이 없이 서 있거나 걷곤 했다는 게 옳은 말일 것 같다. 어찌하였건 저런 모습이 내 모습일 줄은 몰랐다.

무엇이 나를 저렇게 만들었을까. 그렇지, 그것이 그랬구나. 그것이 저리 해찰을 부렸구나. 세월이다. 세월이란 무심히 흘러가는 것 같지만 강물처럼 유유하고 유장하게 흘러가지는 않는 것 같다. 제 자국을 꼭 남긴다.

물론 세월은 사람에게서만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나무며 풀이며 꽃이며 길짐승, 날짐승이며 미물에게까지도 다 흘러간다. 그 방법도 껴안든지 무얼 잡아끌든지 채찍질하든지 때에 따라 대상에 따라 다 다른 흔적을 남기며 흘러갈 수 있다.

나의 세월은 나를 어떻게 채근해 왔던가. 돌아볼수록 나에게는 별로 살갑거나 자비롭게 대해 준 것 같지는 않다. 내 탓이 클 것이다. 내가 세월과 잘 친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가 제 할 탓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어찌하였든 나의 세월이란 나를 따뜻하게 품어주거나, 다정히 손을 잡아주기보다는 나를 떠밀려 했고, 힐책하려 했고, 그러다가 자빠지게도 하고, 그래서 몸과 마음에 생채기를 남겨주기도 하면서 나를 살아오게 한 것 같다.

나에겐들 아늑하고 온기 어린 세월이 왜 없었을까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혹은 맑은 물은 흘러가고 자갈만 강에 처져 남듯 그런 기억은 묻히거나 흘러가 버리고 세월의 상반傷瘢들만 남이 있는 것 같아 사는 일이 허허로워지기도 한다.

그뿐이랴, 그 세월의 뒷자락에 나에게 남은 일은 사람이든 무엇이든 모두 나에게서 떠나갈 일밖에 없는 것 같다. 주위 사람들도 이미 떠났거나 떠나려 하고 있고, 내 몸도 나에게서 조금씩 떠나고 있다. 내 손때 묻은 것들도 차츰 사라져가고 있다.

돌아보면 허전하고, 둘러보면 뭔가 자꾸 비어가는 것 같아 고적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 고적의 끝자락엔 뭐가 기다리고 있을까를 돌아보는 순간, 체념이랄지 항심抗心이랄지 상념의 반전이 불현듯 일기도 한다. 다 빌 때까지 그냥 살아보자고-.

인디언의 방식으로 세상을 사는 법에 이런 말이 나오는 걸 봤다.

한 번에 하루 치의 삶을 살라. 그럼으로써 모든 날을 잘 쓰라. 정성을 다해 채소를 기르듯 영적인 밭을 일구라.”

그래, 하루 치씩 하루하루 살아가는 거다. 지난날이야 어찌할 수도 없고, 오지 않는 날이야 어차피 나의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냥 하루하루를 사는 거다. 채소를 가꾸듯 하루하루를 살다 보면 영적인 밭도 일구어져 가겠지.

지금 내 몸과 마음에는 수많은 세월의 자국들로 점철되어 있다. 이 구부정해진 허리도 물론 그 자국에 하나일 것이다. 이 굽은 허리가 지금까지 나를 살려온지도 모르겠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내게 찍혀 있는 모든 세월의 자국들과 함께.

내 살아가는 하루하루에도 또 자국이 남아 가게 될 것이다. 그 자국을 더는 남길 자리가 없게 될 때가 내 세상이 끝나는 날일 것이다. 남겨지는 데까지 남겨보자. 그 자국들이 내 영혼의 밭을 더욱 걸게 해줄지 아는가.

오늘 하루도 그렇게 살아보자. 구부정한 허리 거울을 뒤로하고, 세월의 자국을 딛고 넘어서 차를 오른다. 언제 보아도 기쁘고 즐거운 사람들을 만나러 갈 차다.

삽상하게 내딛고 싶은 걸음으로 오른다. (2024.10.2)

                                                                    

 

댑싸리 전설(1)

 

담장 옆 연녹색 댑싸리가 무성하다. 크고 작은 것이 섞여 있지만, 이웃하고 있는 밭의 들깨며 고춧대를 바라보며 저도 그만큼 크고 싶었는지 성큼 자라 우거져 있다. 키만 큰 것이 아니라, 줄기에서 올라와 크고 작게 벋어나온 수많은 잔가지가 사방으로 벌어 둥그스름한 모양을 이루기도 했다.

아내가 봤다면 맑은 미소를 지으며 기뻐했을 것이다. 아내는 청초하고도 복슬복슬한 모습을 탐스럽게 여겼던지 댑싸리를 이뻐했다. 지난해 봄, 어디서 구했는지 댑싸리 씨를 가져와 골목 밭 가에 뿌렸다. 따뜻한 햇볕이 내려앉고 때로는 비가 내리기도 하는 사이에 조그만 싹이 흙을 뚫고 솟더니 소록소록 자라 올랐다.

댑싸리 싹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 무렵 아내는 자주 자리에 눕기 시작했다. 병원을 드나들기도 했지만, 진정이 되지 않아 아이들이 살고 있는 대처로 누울 자리를 옮겼다. 전화해서 좀 어떤지를 물으면, 어디가 어떻게 편치 못하고, 어디 병원을 다녀왔다는 말끝에는 댑싸리의 안부를 묻곤 했다. 복스럽게 자라고 있다고 했다.

어느 날은 전화하여 한 곳에 몰려 있게 하지 말고, 밭 가에 몇 뿌리씩 줄을 지어 옮겨 심어달라 했다. 아내가 말한 대로 한자리에 모여 있는 어린 댑싸리를 두세 뿌리씩 골목 밭둑 옆에 한 줄로 나가면서 옮겨 심었다. 아내에게 이렇게 심었다며 사진으로 찍어 보내주고, 집에 돌아와서 자라는 모습을 보라 했다.

댑싸리는 쑥쑥 잘 자라 났다. 아내에게 댑싸리가 잘 자라고 있다며 전화하니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라 했다. 집 걱정은 하지 말고 병원에 잘 다녀서 빨리 나아서 돌아오라 했다. 댑싸리는 잘 자라나고 있는데, 아내는 병원 다니는 횟수가 잦아져 갔다. 내가 가 볼까 해도 아이들이 잘 돌봐주고 있다 했다.

아내가 집을 떠난 지 두 달이 되어가던 여름 어느 날, 씨 뿌려 나게 했던 댑싸리를 다시 볼 수 없는 세상으로 덜컥 가버리고 말았다. 댑싸리가 무엇을 알까. 무럭무럭 잘 자랐다. 큰 것은 허리를 넘어설 만큼 자라났다. 댑싸리의 그 무심無心이 시리게 아려 보이기도 했다.

계절이 바뀌어 소슬바람이 불던 어느 날부터 잔잔한 잎새며 가지들이 단풍이 들 듯 붉게 물들어갔다. 연홍으로 물들어가는가 싶더니 어느새 훨훨 솟고 있는 불길인 듯 짙붉게 타올랐다. 댑싸리의 꽃말이 오래 참는 사랑, 고백이라 했던가. 마치 참고 참아왔던 사랑의 말을 한꺼번에 불길처럼 쏟아내는 것 같았다.

나에게는 저 타는 불빛이 아내가 참고 참았던 속상한 일들을 한꺼번에 토해내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같이해 오는 동안 속상했던 일들이 한두 가지였을까. 조금씩은 상한 속을 풀어내기도 했었지만, 어찌 다 풀어낼 수 있었으랴. 그 답답한 속을 저 짙은 빛깔로 다 털어내는 것 같기도 했다. 이따금 고개가 숙어지면서 저 빛 같은 얼굴빛이 되어 묵연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가을이 가고 겨울이 들면서 노랗고 하얀빛으로 변하며 서서히 말라 갔다. 찬 바람이 불 무렵 잎은 다 떨어지고 줄기만 앙상하게 남게 되었다. 빗자루로 묶는다는 그 줄기지만, 묶을 엄두를 못 내고 그대로 거두었다. 댑싸리는 거두어 지면서 잊지 않았다. 제 씨앗을 세상에 남기는 일을-.

봄이 왔다. 언 땅이 녹고 따뜻한 바람이 불면서 댑싸리가 서 있던 자리에 하나둘 싹이 돋기 시작했다. 댑싸리만이 아니라 다른 풀들도 그것과 섞여 돋아났다. 아내 대신 밭을 부치는 이가 있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은 누구라도 밭 가에 두렁에 풀이 돋는 것은 참지 못한다. 모든 풀은 없애야 한다.

가장 쉽게 없애는 방법은 제초제를 치는 일이다. 그도 두렁이며 밭 가에 제초제를 뿌려 나갔다. 한창 솟아나고 있는 댑싸리도 예외는 아니다. 어느 날 보니 밭 가의 모든 풀이 시들시들 잎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중에는 약을 덜 맞았던지 요행으로 피할 수가 있었던지 머리를 들고 있는 것도 있었다.

성한 댑싸리만 골라냈다. 맞은편 담장 아래에 다른 풀을 뽑아내면서 한두 뿌리씩 묶어 아내가 말한 것처럼 한 줄로 옮겨 심었다. 일부러 심어놓은 걸 보면 제초제를 못 치겠지. 쑥쑥 잘 자라는 것도 있고, 좀 작은 것도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연둣빛에서 녹색으로 빛깔을 바꾸어 가며 복슬복슬 자라났다. 아내의 맑은 미소가 보이는 듯했다.

밭 부치는 이가, 씨가 퍼지면 어쩌려고 저러느냐며 걱정했다. 내가 간직하고 있는 댑싸리 전설을 어찌 알 수 있으랴. 안 들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까. 내년에도 더 먼 날에도 아내의 말처럼 한 줄로 가꾸면 된다. 댑싸리를 보고 싶어 했던 그 마음을 가꾸면 된다.

나만이 아는 전설로 가꾸어 나가면 된다.(2024. 9. 16)

                                                                  

 

쓸쓸함에 대하여

 

누군들 쓸쓸할 때가 왜 없을까? 살기에 바빠 쓸쓸할 틈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바쁜 걸 강조해서 하는 말일 것이다. 정녕 쓸쓸할 틈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아무리 바쁜 사람일지라도 문득 쓸쓸함이 밀려올 때가 어찌 없을까.

나는 덜 바빠서 그런지 쓸쓸함을 느낄 때가 더러 있다. 가끔씩 끙끙 앓기도 해야 하는 쓸쓸함에 잠길 때도 없지 않다. 바쁘게 살던 시절이 훌쩍 흘러가 버렸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바쁠 수 있는 기력도 별로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 별로 없는 기력이 가끔은 쓸쓸함을 가져오기도 한다. 어쨌든 이따금 쓸쓸함이 찾아오지만, 그중에서도 혼자 읽기 아까운 시가 있어도 같이 읽거나 들려주면서 마음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을 때 쓸쓸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심장이 / 몸 밖에 달렸더라면 / 네 마음을 더 잘 보았을 텐데…… 아니, 생각이 / 나보다 먼저 잠들기만 했어도 / 너와 더 오래 한집에 머물렀을 텐데……(정끝별, 너였던 내 모든)

이 시를 읽고 있으면 심장의 움직임이 조금씩 빨라져 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무엇 까닭일까. 설령 심장이 몸 밖에 달려 있다 해도 나에게 심장을 보여줄 사람도 없고, 내 심장을 보여줄 사람도 없다는 게 쓸쓸하다.

없다라는 말 속에는 있었다가 없어졌다.’라는 뜻도 있고, ‘처음부터 있지 않다.’라는 뜻도 있을 테지만, 나는 어느 쪽이라는 걸 굳이 말로 드러내고 싶지 않다. 말이 되어 나오는 순간 상념은 또한 쓸쓸함에 빠질 것 같기 때문이다.

나를 더욱 쓸쓸하게 하는 것은 그다음 구절이다. 너를 향한 생각이 나보다 먼저 잠들 수 있다면 나는 언제까지나 너를 안고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생각이 잠들어주지 않으니 너와 나 사이의 거리일지 벽일지 그런 게 자꾸 멀어지고 두꺼워지는 것 같아 점점 더 쓸쓸해진다.

이런 시를 같이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내 젖은 목소리로 들려줄 수 있는 이 누가 있다면 쓸쓸함이 쓸쓸함을 녹여줄 것도 같다. 결국은 이 시가 나를 더욱 쓸쓸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래도 괜찮다. 내 쓸쓸함을 시가 대상代償해 줄 것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쓸쓸함보다 조금 더 짙은 쓸쓸함이 엄습해 올 때는 저녁밥을 혼자서 먹을 때다. 어찌하다 보니 삼시 세끼를 혼자서 치러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현실과 더불어 고단하게 사는 처지 속으로 병고까지 찾아왔다.

마냥 죽으라는 법은 없었던지, 고마운 제도가 고마운 분이 나를 찾아오게 해주었다. 하루 두어 시간 내 사는 일을 돌봐줄 뿐이지만, 나에게는 그야말로 구세주 손길이다. 그 길지 않은 시간을 아껴가며 정성을 다해주는 마음이 신고, 심고를 잊게도 해준다.

아침 일찍 나에게로 와 내 하루를 시작하게 해주고 하루 지낼 일을 마련해 놓고 가면, 그 마련으로 하루를 지내곤 하는 날들이 이어져 갔다. 그 정성스러운 마련이 감동을 주기도 했지만, 아침밥이나마 같이 먹을 이가 있다는 것이 여간 큰 위안이 아니었다.

그 위안은 아침으로 끝나야 한다. 점심과 저녁은 혼자서 맞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맞이는 물론 아침에 마련해 놓은 것으로 해결할 수 있기에 이 또한 다행이라 할 수 있지만, 쓸쓸함은 내 몫이 되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점심때는 창밖으로 보이는 푸른 하늘과 녹음 짙은 산이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위안거리가 될 수 있지만, 저녁은 어스름 황혼 빛이거나 어둠 속에서 허우적대는 전등 빛 아래에서 홀로 술을 들다가 보면 국물 맛이 눈물 맛같이 다가올 때가 있다.

이렇게 혼밥 상과 함께한 이력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건만, 왜 이리 여물어지지 못했을까. 모든 것을 혼자서 해결해야 할 때도 없지 않았는데, 도움을 주는 이가 있음에야 더욱 여물어져야 할 것이 아닌가. 모를 일이다.

그랬던 것 같다. 혼자 한 마련으로 먹고 자고 할 때는 오직 생존 일념뿐이었던 것 같다. 비록 울울한 심정으로 술을 들지언정,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돌아봐 줄 이가 아무도 없다는 긴장감, 절박감이 쓸쓸함을 조금 앞질러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지금은 잠시간이나마 함께할 수 있는 이가 있다는 것이 생존에서 벗어나 생활 속을 살고 있다 싶어 안도감을 준다. 오히려 그 안도감이 쓸쓸함을 몰고 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침과 저녁의 처지가 같지 않은 데서 오는 쓸쓸함은 또 무엇인가.

생활이 생존보다 더 쓸쓸한 것 같다. 생존은 간혹 거부하는 이도 있지만, 누가 생활을 마다할 수 있는가. 어차피 사람은 생활 속을 살아야 할 존재라면, 쓸쓸함은 모든 사람이 원죄로 타고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쓸쓸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오늘 저녁도 쓸쓸한 술을 든다. 밥술을 들고 가끔은 술잔도 든다. 이 저며오는 쓸쓸함이 나의 생활이라면 도리 없는 일이다. 쓸쓸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일인 것을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을까. 쓸쓸함을 보듬기도 하면서 숨 쉬어 나가는 수밖에 없는 것임을 나만이 아는 일일까.

생활 속의 쓸쓸함이여, 쓸쓸함 속의 생활이여! (2024.9.2.)

                                                                      

 

위대한 정령

 

밭에 나는 풀이 너무도 성가시다. 베어내도 나고. 뽑아도 나고 깊숙이 캐내어도 또 난다. 난 풀들은 쑥쑥 잘도 자란다. 아침저녁이 다르고 하루하루가 놀랍다. 신기하다. 이 풀들은 누가 씨를 뿌리고 누가 가꾸는 것일까. 돌보는 이가 없다면 이토록 끈질긴 생명력으로 나고 살고 무성해질 수 있을까.

심어서 가꾸려 하는 작물은 뜻대로 잘 나지도 않고 자라지도 않는다. 잘 나라고 씨뿌리기 전에 땅에다 거름을 묻고, 나면 비료를 주고 병 들지 말라고 약을 쳐주고 해도 바라는 대로 키우기는 쉽지 않다. 원하는 결실을 거두기는 더 어렵다. 저 풀을 가꾸는 손길에 비하면 작물을 가꾸는 사람의 손길이며 그 힘이란 보잘것없는 것 같다.

누가 가꾸든 모든 식물에는 꽃이며 열매가 다 피고 열리기 마련이다. 단지 그 열매를 사람이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차이일 뿐이다. 사람이 못 먹으면 새며 짐승이 와서 먹고 남은 것은 씨앗이 되어 또 난다. 경영은 마찬가지다. 어쩌면 야생의 초목이 더 많은 생명체를 살려 나가는지도 모른다.

야생의 이런 경영은 누가 하는 것일까. 일찍이 인디언들은 위대한 정령이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말로는 와칸 탕카(Wakȟáŋ Tȟáŋka)라고 하는 존재다. 새가 울고 꽃이 피고 비버며 들소가 뛰어다니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하는 모든 것이 와칸 탕카, 위대한 정령이 하는 일이라 했다.

인디언들에게는 성경도 없고 교회도 없다. 그렇지만 절대적인 믿음은 있다. 아침에 해가 뜨면 만물의 아버지라며 감사하고, 흙은 대지의 어머니라며 감사하고, 강물은 대지의 핏줄이라며 감사하고, 바람은 대지의 숨결이라며 감사한다. 약초를 캐면서 그 풀에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들소를 사냥하여 먹거리와 옷을 삼으며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자연의 모든 것이 경배의 대상이다.

그 모든 것이 위대한 정령이 하는 일이라 여겨 오직 감사하고 숭배하는 것으로 그들의 신앙을 삼는다. 그리하여 풀 한 이파리, 미물이며 짐승의 목숨 하나도 허투루 여기지 않는다. 필요하여 채취하거나 수렵을 할 때도 경배의 기도를 먼저 올린 후에 실행한다고 한다. 위대한 정령에게 올리는 기도다.

위대한 정령이라는 게 정녕 있기나 한 건가. 인디언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고 한다. 어떤 이가 위대한 정령의 정체를 알고 싶어 보이지 않는 정령에게 말씀을 들려 달라 하니 종달새가 노래했다. 그래도 또 말씀을 들려 달라 하니 천둥을 굴러다니게 했다. 모습을 보여 달라 하니 별을 빛나게 했다. 기적을 보여 달라 하니 한 생명을 탄생시켰다. 한번 만져 달라 하니 나비를 내려앉게 했다. 사람은 나비를 쫓아 보내고 떠나버렸다고 한다. 세상 모든 것이 위대한 정령의 일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문명한 백인들이 야만스러워 보이는 인디언의 땅을 침략했다. 백인들은 인디언들에게 그들의 교회며 학교에 다니라 하고, 살기 좋게 한다며 땅을 마구 파고 나무를 무참하게 찍어 넘기고 높은 집을 짓고, 조용하던 들판에 철로를 놓아 기차를 다니게 했다. 살기 좋아지기는커녕 온갖 공해며 질병이며 범죄가 만연해져 갔다.

그 문명인들은 자연은 정복하는 것이라 했다. 모든 것을 자신들의 뜻대로 고치려 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풀은 잡초라고 부르며 짓밟았다. 인디언들은 세상에 잡초라는 것은 없다고 여겼다. 모든 풀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할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쓸모없는 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어느 쪽이 더 괜찮은 삶일까.

마을 앞에는 강이 흐르고, 강둑 위에는 정자가 놓여 있다. 정자 옆 마을 쪽에는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 노거수가 우람하게 서 있고, 강 쪽에는 봄에는 해사한 꽃을 피우는 벚나무며 절로 난 온갖 초목이 우거져 있다. 어느 날 그 초목들이 무참히 잘려져 나갔다. 나무들이 너무 자라 강의 경관을 막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민원을 받은 관에서 한 일이다.

정자에 앉아 물 맑게 흐르는 풍경을 바라며 즐기는 것은 운치 있는 일이다. 그 운치를 위해서 나무를 베어낼 수도 있다. 관의 발주를 받은 사람들은 그걸 어떤 마음으로 베어냈을까. 강과 정자의 경관을 살릴 수 있도록 나무를 다듬는 마음으로 벤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베어내라니까 아무 생각 없이 마구잡이로 쳐 없애버린 것 같다.

오래된 벚나무의 커다란 가지들도 흉물스럽게 잘라 커다란 둥치만이 처참하게 서 있게 했다. 저 끔찍한 모습이 정자의 운치를 살려 줄 수가 있을까. 인디언처럼 위대한 정령의 존재에 관한 생각은 못 한다 할지라도 모든 것이 사람과 함께 공존해야 할 생명체로 여겼다면 저리 무참히 자르지 않았을 것이다.

인디언이 들소를 잡아 고기로 양식으로 삼고 가죽으로 옷을 해 입으면서도 위대한 정령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잊지 않았듯이, 자연물을 어떻게 쓰더라도 세상을 함께 사는 다 같은 생명체라는 생각만은 잃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일까.

저 푸른 산의 나무며 저 들길에 함초롬히 핀 꽃, 저 숲속을 날아가는 새들이며 저 꽃을 찾아드는 나비들은 누가 가꾸며 누가 거두는 것일까. (2024.8.19.)

                                                                 

 

기다림에 대하여(6)

 

오늘 아침에도 내 귀는 현관문 쪽을 향해 있다. 그가 여는 문소리가 곧장 들릴 것 같다. 그는 나의 요양을 도와주는 분이다. 어쩌다 보니 홀로서기가 어렵게 되었다. 곁에 아무도 없는 지경이 된 데다 질고까지 겹쳤다. 관계 기관에서 내 처지를 헤아려 보내준 분이다.

정해진 시각 무렵에 어김없이 문이 열린다. 밤새 안녕을 묻는 인사와 함께 나의 하루에 필요한 일들을 챙겨나간다. 이내 몇 가지 찬이 어우러진 아침상이 들어온다. 텃밭 남새로 마련한 찬과 함께 집에서 보듬어온 정성도 곁들였다.

그가 여는 문소리는 요즘 내 삶의 고즈넉한 동력이고 희망의 시그널이다. 나는 그를 편안하고도 고마운 눈길로 바라지만, 그는 나의 눈길을 여밀 틈도 없이 바쁘다. 길지 않은 시간 안에 내 하루 소용되는 일들을 다 해 놓아야 한다. 지성을 다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의 일은 나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또 나와 처지가 같은 사람에게로 가서 나에게 하는 그 정성을 쏟는다. 워낙 몸과 마음에 밴 일이라 어디서나 손길이 익다. 나에게 와서 임무를 다하고, 자리를 옮겨 한 번 더 되풀이하는 것이 자기 생활의 리듬이 되어 있다.

내가 그 리듬을 깰 때가 있다. 주중 어느 한 요일은 나에게 질고를 뛰어넘어 생기 찬 날이 된다. 글을 좋아하는 이들과 만나 글 속에 담긴 삶의 희비와 고락을 즐겁게 나누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날에 대한 기다림이 내 한 주를 힘내어 살 수 있게 해준다.

그날이 되면 나는 활기에 넘치지만, 그는 불편을 겪어야 한다. 나의 그 즐거움 때문에 그는 자신의 생활 스케줄을 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일과 나중 일을 바꾸어야 하는 것은 물론, 양쪽 시간대도 다시 설정해야 한다.

어느 날 그가 웃으며 했다. “그냥 가만히 계시면 안 돼요? 그러면 아무 일 없을 텐데…….” 내가 말했다. “그러면 좋을까요? 그런 날도 없이 가만히만 있다 보면, 저를 돌봐주시기가 더 힘들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고 나도 웃었다.

맞아요. 괜히 해본 소리예요. 기대할 게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가요? 그 바람에 힘을 내실 수 있다면 저에게도 좋은 일이지요. 일 좀 바꾸는 게 뭐 대순가요?” 하며 환한 미소를 짓는다. “고마워요. 그 마음 때문에 저는 외로운 것도 아픈 것도 잊고 살잖아요.”

순간, 그의 눈동자에 이슬이 반짝이는 듯했다. 내게로 옮아 오는 듯도 했다. 그의 불편을 딛고 내 즐거움을 누리는 것 같아 민망스럽기도 하지만, 그렇게 안아주는 너그러움이 있기에 나는 불행 속에서나마 작은 행복을 누릴 수 있어 고마울 따름이다.

어느 공립 도서관 평생교육 과정의 하나로 수필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글 속에 깃들인 삶을 서로 나누어 온 지도 수년이 흘렀다. 그동안 많은 이들과 만나고 헤어지고 했지만, 모두 마음도 글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워서인지 그들과 함께 울고 웃는 일이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 되고 있다.

그들을 만나 들려줄 이야기며 들을 마음을 준비하면서 그날을 기다리다 보면 신고身苦도 심고心苦도 나의 것이 아니게 여겨질 때가 많다. “기다릴 게 남아 있는 사람은 / 행복한 사람이다.”(김원호, 행복한 사람)라고 한 어느 시인이 말이 돌아보인다.

저 노을처럼 저문 삶을 살고 있는 내가 무얼 더 바랄 게 있을까. 그런 가운데서도 아침마다 기다리는 희망의 문소리가 있고, 글로 함께 마음 나눌 사람들을 기다릴 수 있는 날이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참 행복한 일들이다.

시인의 말은 이어진다. “설사 그 기다림이 / 기다림으로 끝나버린다 해도 / 저문 길목에 서서 / 보고 싶은 얼굴을 기다리며 / 작은 소리 하나에도 귀를 열고 / 숨죽이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그렇다. 기다림만으로 끝나도 괜찮다. 기다리기만 하다가 세상을 바꿀지라도, 기다림은 희망을 주고 그리움을 남기지 않는가. 크지 않아도 된다. 화려하지 않아도 좋다. 소소한 기다림이면 어떤가. 어쩌면 그런 소박한 기다림이 더 소곳하고 아늑할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기다리며 살고 있는 그 기다림들은 어느 때가 되면 나를 떠나거나, 내가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아직 오지 않은 때는 나의 것이 아니다. 나의 때도 아닌 걸 왜 미리 기다림으로 두어야 할까. 그때는 그때대로 오롯한 기다림이 있지 않으랴.

오늘 기다림은 나의 할 일이다. 나의 둘레에는 좋은 사람들이 있다. 그 기다림과 좋은 사람이 주는 희망이 있다. 임마누엘 칸트가 말했다지 않는가. ‘할 일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희망이 있다면 행복한 사람이라고.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기다림이 있으므로. (202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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