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힘을 별로 들이지 않고 내 뜻대로 길을 달려 보기는 평생 처음이다. 지금까지는 가쁜 숨에 땀을 닦아가며 달리거나, 달려주는 기기를 위해 상당한 비용을 치르면서 달려야 했지만, 지금 나는 힘도 비용도 아주 적게 들이면서 내 뜻을 따라서 가는 길을 달리고 있다.
흘러가는 세월이 내 땀으로 내달을 수 있는 길을 거두어갔다. 한 발 한 발 디뎌 걸을 수 있는 길을 내어주는 것만으로 만족해하고 감사해하며 걸어야 할 처지가 되었다. 그것도 힘닿는 데까지다. 그 한계를 넘어서면 다른 것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
가장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자전거다. 자전거는 걷는 것보다는 적은 힘으로, 걸어서 갈 때보다는 더 먼 길을 갈 수 있게 주는 이기다. 그렇지만 자전거도 내 힘을 적지 않게 들여야 갈 수 있다. 두 바퀴로 달리려면 균형 감각을 잃어서도 안 된다.
세월의 심술은 그 이기를 쓰는 것마저도 만만치 않게 했다. 오르막을 달리기는 걷는 것 못지않게 힘 들뿐만 아니라, 내리막을 달리는 것도 긴장을 늦추면 안 된다. 세월은 그 힘이며 그 긴장마저도 거두어가려 할 때가 있다.
나에게는 차도 없고, 차를 몰아본 적도 없다. 기계 조작에 손방인 탓이겠지만, 그 기계가 가지고 있는 속성이며 속도를 감당할 자신이 서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면허 시험에 한 번 낙방하고는 흥미도 자신도 싹 잃고 말았다.
그렇다 보니 나에게 남은 교통수단은 걷기와 대중교통뿐이게 되었다. 달리기는 못 해도 걷기는 열심히 하고 있다. 걷기는 나의 교통수단일 뿐만 아니라 건강 유지의 유용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걷기에 먼 길은 조금 불편이 따르긴 해도 대중교통 수단을 잘 이용하고 있다.
문제는, 걷기에는 조금 멀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는 그리 먼 길도 아니거나 이용할 수도 없는 길을 갈 때다. 예컨대, 농협에 가서 금융 볼일도 봐야 하고, 우체국에, 면사무소에 가서 소용되는 일도 해야 할 경우가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자전거 이용도 만만찮은 지금-.
아들이 전동 스쿠터를 권했다. 그것인들 속도가 나는 기계가 아닌가. 여러 가지 조작법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 염려하지 않아도 좋을 거라 했다. 조작도 아주 간단하고, 속도도 사고 위험이 별로 없을 정도로 나는 것이라 했다.
그러면 어디 한번 타볼까? 마트에 가서 생필품도 사 와야 하고, 때로는 동행인도 함께 탈 수 있는 게 있겠느냐 하니, 있다며 주문하여 보내주었다. 간단한 조작으로 짐칸을 좌석으로 바꿀 수 있는 삼륜 스쿠터였다. 충전만 잘하면 웬만한 거리는 내왕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운전도 어렵지 않았다. 오른쪽 손잡이를 틀어주면 나아가는데, 트는 각도에 따라 느리게도 빠르게도 할 수 있다. 그 각도만 주의해서 잘 틀면 별 위험은 없을 것 같다. 전, 후진 변환과 굽이 돌기에 유의해야 할 것 같다. 브레이크는 자전거와 같아 익숙하다.
잘 달려나갔다. 새 세상을 달리는 것 같았다. 핸들만 잘 잡고 있으면 내가 원하는 속도로 내가 필요한 곳을 큰 힘 들이지 않고 달려나갈 수 있다. 나에게는 새로운 세상, 그 세상으로 가는 길이 열리는 듯했다. 세월의 심술도 말려 줄 듯했다.
바르게 난 길도 달려 보고, 굽잇길도 달려 본다. 우리 인생도 그렇고 내 삶도 그랬던가. 굽잇길 달리기보다는 바른길 달리기가 쉽고도 편안하다. 내 살아오면서 바른길이 어디에 있는 줄 몰라 굽이진 험로를 헤맨 적은 없었던가.
굽잇길 돌기가 얼음판같이 조심스럽긴 해도 그런 길이 없다면 바른길인들 어찌 있으랴. 굽잇길이 없다면 바른길의 편안을 어찌 알 수 있으랴. 바른길도 굽잇길도 모두 내가 달려야 할 길이다. 굽잇길을 단련하다 보면 바른길 달리기도 더욱 편해질 것 같다.
주의를 기울여 달려야 하기는 바른길과 굽잇길이 다를까. 삶의 길인들, 이 스쿠터의 길인들 한눈을 팔지 말고, 긴장을 풀지 않고 달려야 함이 다를까. 내 살아온 길이 새삼스레 돌아보지만, 돌아보기는 차를 내려서 해야 할 일, 오직 앞만 보고 달릴 일이다.
농협 마트로 갔다. 선물 상자 몇 개를 샀다. 나에게 인정을 베풀어준 이웃들에게 작은 정성이나마 전하기 위해서다. 짐칸에 싣기가 편리하다. 이 탈 것이 아니면 이런 걸 어떻게 옮길 수 있으랴. 이웃에 진 신세를 조금이나 갚을 수 있다 싶어 마음이 유쾌해진다.
이 스쿠터가 준 유쾌가 아닌가. 이 차를 아끼고 사랑할 일이다. 오래오래 유쾌해지기 위하여-. 많이 타고 잘 타는 것만이 아끼고 사랑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이 차에 너무 의지하지 않는 것도 아끼는 일일 수 있을 것이다.
세월의 심술을 녹여 보리라며 이 차에 모든 행보를 맡기다가 내 발걸음이 쇠퇴해지면 어쩌랴. 내 건강이 쇠해지면 어찌하랴. 이 차를 아껴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부지런히 걸을 일이다. 안전하게 타기 위해서라도 힘내어 걸을 일이다.
달려온 스쿠터를 창고에 들여 쉬게 하고, 늘 걷는 해거름 산책길을 나선다.
걸음을 가볍게 옮겨 나아간다. ♣(2024. 12.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