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오늘도 산을 오른다. 봄이 무르녹고 있는 산은 하루가 다르게 푸르러지고 있다. 맨 먼저 봄을 싣고 온 생강나무와 진달래는 노랗고 붉은 꽃을 내려놓고, 새잎을 수줍게 돋구어내고 있다. 겨우내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감태나무 마른 잎은 새 움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가지를 떠난다.

지난가을에 떨어진 씨앗이 땅속에 들었다가 새싹이 되어 세상으로 눈을 내미는 것도 있을 것이다. 큰 소나무 아래 조그만 소나무가 기지개를 켜고 있다. 작년에 혹은 재작년에 태어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고 자란 나무들은 작은 것은 작은 대로, 큰 것은 큰 대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나무들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산다. 큰키나무도 있고, 떨기나무도 있다. 바늘잎나무도 있고 넓은잎나무도 있다. 늘푸른나무도 있고 갈잎나무도 있다.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도 있고, 기름진 흙 속에 몸을 담그고 있다. 높은 곳에 훌쩍 서 있는 것도 있고, 골 깊은 곳에서 하늘을 향해 긴 목을 뽑아 올리고 있는 것도 있다.

철 따라 붉고 희고 노란 꽃을 울긋불긋 피워내는 나무도 있는가 하면, 꽃은 보일 듯 말 듯 푸른 잎들을 치렁하게 돋우어내고 있는 것들도 있다. 가을이면 큼지막한 열매를 뚝뚝 떨어뜨리는 나무도 있는가 하면, 잔잔한 열매를 남몰래 땅에 묻는 것도 있다.

산에 꽃 피고 잎 돋아 푸르고 싱싱한 나무만 사는 게 아니다. 천명이 다해 잎을 다 떨어뜨리고 강대나무로 말라가는 것도 있고, 아예 드러누워 흙이 되어 가면서 뭇 벌레와 짐승들의 집이 되고 놀이터 노릇을 하는 것도 있다. 산에는 산 나무만 사는 것 아니라 죽은 나무도 함께 살고 있다.

산은 나무만 사는 곳이 아니다. 크고 작은 온갖 날짐승, 길짐승들도 살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잔살이들도 깃들인다. 어디 그뿐인가. 사람들도 터전 삼거나, 이따금 찾아들지라도 산을 의지하며 살지 않은가. 이 목숨들이 산 아니면 어찌 숨을 고를 수 있을 것인가. 죽어서 들어야 할 곳도 결국은 산이 아니던가.

이렇듯 산에는 갖은 나무를 비롯한 온갖 생명체들이 갖가지 모습으로 살고 있다. 산이 없다면 태어날 수도,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며, 죽어있는 것들까지도 모두 산을 바탕 자리로 하고 있다. 산이 모든 것들을 태어나게 해주고, 살게 해주고, 죽어 묻히게 해주는 걸까. 산이 이 모든 것을 다스리고 있는 걸까.

아니다. 산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무런 솜씨도 꾀도 부리지 않는다. 씨알이 날아와 앉았다고 갈무리하여 묻어주지도 않고,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고 건사하여 보듬어 주지도 않는다. 물길이 고르지 않다고 물을 대어 주거나, 난 자리가 척박하다고 기름진 흙을 채워주지도 않는다. 나는 대로 사는 대로 그냥 놔둘 뿐이다.

그래도 산은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 나고 살 자리도 깃들게 하고, 살다가 죽어서 들 자리도 틀게 한다. 살아 아리따운 꽃과 잎도 피우게도 하고, 죽어 새로운 생명이 되어 새 세상을 이루게도 한다. 향기도 감돌게 하고, 싱그러운 기운도 풍기게 한다. 산은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산에는 모든 것이 잘 피어나 잘살고 있다.

노자가 바로 이런 산의 모습을 보고 도는 언제나 무위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다.(道常無爲而無不爲, 道德經37)”라 한 것이 아닐까. 산에 나무들이 죽죽 하늘 향해 뻗어나는 것이, 아름다운 꽃이 피고 푸름이 넘치는 것이, 뭇짐승들이 제 세상으로 한껏 뛰어노는 것이 바로 무위(無爲)’ 때문이라 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 산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해낸다. 모든 생명을 이루어내고 모든 기운을 일으키게 한다. “만물을 만들어 내지만, 제게서 비롯된 것이라 하지 않는다.(萬物作焉而弗不始, 道德經2)”는 말도 산을 두고 한 말일 것 같다. 이 산이 바로 ()’, 도가 바로 산이 아니고 무엇인가. 노자는 산에 산다. 산이 바로 노자다.

사람아,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이루어내기 위하여 산다는 사람들아! 돌아보라, 누구를 위한다는 위선이 오히려 수많은 이들을 힘들게 하지는 않는가. 무엇을 이루어내려는 탐욕이 세상의 많은 것을 피폐하게 만들지는 않는가. 그런 이념들 때문에 세상이 조각나고 있지는 않은가.

노자는 또 성인의 말씀을 빌려 내가 무위하면 백성들은 저절로 교화되고, 내가 고요함을 좋아하면 백성들은 저절로 올바르게 된다.(我無爲而民自化 我好靜而民自正, 道德經57)”라 했다. 이 말씀의 뜻도 산의 도와 다르지 않을 터이다. 웬만하면 모든 걸, 모든 사는 일을 그대로, 그 모습 그대로 둘 수 없을까. 산처럼, 산의 도처럼-.

내 누구를 향해 무어라 하랴. 내가 산을 오르고 싶어 하는 건, 산같이 살지 못해 산을 그리고 있음이 아닌가, 그 무위의 도를 바라고 있음이 아닌가. 어찌하면, 언제쯤이면 그 산이 될 수 있을까. 그냥 살아도 마음이 자유로운 삶이 될 수 있을까.

오늘도 산을 오른다. 산이 아무것 하지 않아도 나무가 무성히 푸르러지고 있다. 원 없이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 푸른 하늘에 흰 구름 한 점 유유히 날고 있다.(202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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