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화 대궁은 오늘도 솟지 않았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벌써 솟아 탐스런 꽃을 피우거나, 한창 솟아나기도 할 대궁이다. 다른 곳에는 더 일찍 기다란 대궁 위에 활짝 핀 분홍색 꽃을 사방으로 달고 있기도 하지만, 마을 숲엔 그늘이 많이 지는 탓인지 좀 늦게 피어난다.
아무리 늦게 핀다고 하여도 올해는 너무 늦다. 왜 여태 피지 않는 걸까. 한 해를 그냥 지나가려는가, 초조하고 불안해지기도 한다. 작년보다 다른 게 있다면 그 꽃밭 둘레에 금줄이 둘러쳐져 있다는 것이다. 마을 숲엔 소나무 느티나무 회나무 팽나무 노거수가 우거져 여름이면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상사화는 그 나무들이 우거진 숲의 가장자리 한 곳을 차지하여 피어난다. 그 시원한 숲 그늘을 찾는 행락객들의 걸음이 잦다. 작년 어느 행락객이 상사화가 피어난 자리 바로 옆에 천막을 치더니 대궁을 마구 부러뜨리고 짓밟았다. 그 만행이 하도 미욱하고 안타까워 꽃밭 둘레에다가 막대를 박아 금줄을 쳤다. 다행히 그 금줄 안으로는 침범하지 않았다. 남은 상사화는 꽃이 지고 가을이 깊어지면서 대궁도 말라 땅 속으로 들어 한 해의 삶을 마쳤다. 눈 내려 쌓이던 겨울도 가고 봄이 올 무렵 상사화는 쌓인 낙엽을 뚫고 난초 같은 잎을 피워 올렸다. 봄이 무르익어 가면서 차츰 자라 두껍고 넓은 춘란처럼 무성한 잎을 피워 내더니 봄이 저물어 갈 무렵 서서히 말라들기 시작했다. 잎사귀에 노란 물이 드는가 싶더니 이내 황갈색으로 변하면서 여름이 고비에 이를 무렵부터는 잿빛이 되어 사그라져 갔다. 그래, 저 잎이 저렇게 사그라져야 꽃이 필 수 있지 않은가. 잎과 꽃은 서로 만나지도 못하고 그리워만 할 뿐이라 이름조차 상사화(相思花)라 하지 않았던가. 맺을 수 없는 사랑의 아프고도 슬픈 전설을 간직한 꽃이 아니던가. 이제 곧 대궁이 솟으리라. 내일 아침이면 수줍은 듯 머리를 숙인 채 뾰족이 올라오는 애순을 볼 수 있으리라. 그렇게 기다린 나날이 흘러 여름이 한고비를 넘어 가고 있어도 꽃소식은 아련하기만 했다. 여느 해 같으면 벌써 한창 피어 있을 때도 넘어섰다. 상사화를 기다리는 일이 어느새 나의 일상이 되어갔다. 날마다 산책길 마을 숲에 들면 맨 먼저 상사화 밭을 찾아간다. 저는 무얼 그리고 있을지 몰라도 나는 저를 향한 그리움에 떨다 못해 애틋한 모심으로 온 가슴을 채운다. 내 그리움은 잡초로 돋아날 뿐이었다. 잡초만 성성해질 뿐 꽃 대궁은 보이지 않는다. 대궁이 솟아나지 않는 까닭을, 꽃이 피지 않는 연유를 모르겠다. 꺾이지 말고 밟히지 말고 잘 피어나라고 금줄을 쳐준 것밖에 없는데, 어여쁜 모습으로 피어나기를 오로지 빌기만 했을 뿐인데, 내 간곡한 바람을 왜 저버리려 하는 걸까?
말라 사그라진 잎의 혼이 나에게로 온 걸까. 그래서 꽃을 그리워만 해야 하는 걸까. 올여름 많이 가물긴 했지만, 여느 풀꽃들은 여상하게 피고지고 하지 않는가. 이 무슨 머피의 법칙(Murphy’s Law)이란 말인가. 정녕 샐리의 법칙(Sally’s Law)은 나의 것이 아니란 말인가. 고래를 사랑하는 어느 시인은 바다로 나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고래를 기다리다가 ‘고래는 기다리는 사람의 사랑 아니라/ 놓아주어야 하는 바다의 사랑이기에’(정일근, ‘기다린 다는 것에 대하여’) 떠나간 것은 기다리지 않겠다며 쓸쓸이 바다를 떠나고 있다. 그래도 나는 떠나지 않겠다. 상사화는 기다림의 사랑이기에 인내를 바쳐 기다리겠다. 상사화는 여러해살이 풀꽃이라 했다. 올해 꽃을 보지 못하면 내년 봄의 잎을 기다리겠다. 그 잎 뒤의 꽃을 다시 기다리겠다. 내 삶 속에서 기다림이 나를 초조하게 했던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돌아보면 내 삶의 내력이란 기다림의 초조를 넘고 건너온 역정이었던 것도 같다. 고달플 때도 그리울 때도 기다림이 있었기에 나는 살아올 수 있었다. 그 기다림은 삶의 간난도, 사랑의 신산도 다 안아주고 보듬어주는 따뜻한 손길이었다. 그 손길 속에서 한 세상 생애가 흘러갔다. 나는 지금 그 세월이 맺어준 열매를 안고 살고 있다. 세상의 고단한 짐들을 벗어버리고 이 한촌을 찾아와 색색 빛나는 풀꽃이며 윤슬 반짝이는 물빛과 더불어 살고 있는 것도 기다림이 준 선물로 알고 기꺼이 살아가고 있다. 상사화가 피기를 바라고 있는 지금의 내 마음도 기다림의 세월 나무에 열린 한 열매일지도 모른다. 이 꽃을 간절히 사랑할 수 있는 것도, 그리운 사람을 간절히 그리워할 수 있는 것도 기다림이 맺어준 따뜻한 열매라 믿고 싶다. 오늘도 상사화는 피지 않았다. 내일 피지 않으면 내년을 기다릴 것이다. 그 기다림이 곧 오늘을, 올해를 간곡하게 사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 간곡한 삶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내 살아온 이력이 그러했던 것처럼-. 내 기다림의 끝은 어디일까. 이 세월의 끝은 또 어디일까. ♣(2015.8.9.) |